[정철훈의 현대시 산책 감각의 연금술] ⑤ 세계의 끝에서 태어나는 시적 예감… 시인 이장욱

Է:2012-03-09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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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훈의 현대시 산책 감각의 연금술] ⑤ 세계의 끝에서 태어나는 시적 예감… 시인 이장욱

현재를 반성하고 미래를 연습하기

소규모 인생에서 찾은 미적 전망


이장욱(44) 시인은 시, 소설, 평론이라는 세 가지 작업을 수행한다. 그만큼 언어는 그에게 있어 수단이며 목적이다. 이 역설을 견디는 게 관건이다. 시는 서정의 집이므로 서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하고, 소설은 서사의 집이기에 이야기를 효율적으로 전달해야 한다. 여기에 평론까지 가세하면 세 꼭짓점의 역학은 복잡해진다. 자칫 서사와 서정의 빈곤에 더불어 평론의 빈곤까지 초래할 수 있다.

이장욱은 어느 쪽도 놓치지 않는다. 그의 시 사용법엔 세 가지가 다 들어 있다. 현재를 반성하고 미래를 연습한다는 의미에서다. 그에게 언어는 부단히 되돌아가야 할 상처이자 바로 거기서 다시 시작해야 할 출발점이다.

“식빵가루를/ 비둘기처럼 찍어먹고/ 소규모로 살아갔다./ 크리스마스에도 우리는 간신히 팔짱을 끼고/ 봄에는 조금씩 인색해지고/ 낙엽이 지면/ 생명보험을 해지했다./ 내일이 사라지자/ 모레가 황홀해졌다./ 친구들은 하나 둘/ 의리가 없어지고/ 밤에 전화하지 않았다./ 먼 곳에서 포성이 울렸지만/ 남극에는 펭귄이/ 북극에는 북극곰이/ 그리고 지금 거리를 질주하는 사이렌의 저편에서도/ 아기들은 부드럽게 태어났다./ 우리는 위대한 자들을 혐오하느라/ 외롭지도 않았네.”(‘소규모 인생 계획’ 부분)

이장욱은 소규모로 살아가리라고 결심한 듯하다. 21세기를 거시적 영감으로 휘감아 거칠게 전망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 오히려 일상 속 소규모 접합 지점에 가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미적 전망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소규모 인생계획’을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울리는 포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규모 인생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무감각과 자의식 실종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한단 말인가.

“동사무소에 가자/ 왼발을 들고 정지한 고양이처럼/ 외로울 때는/ 동사무소에 가자/ 서류들은 언제나 낙천적이고/ 어제 죽은 사람들이 아직/ 떠나지 못한 곳// (중략) 동사무소란 무엇인가// 동사무소는 그 질문이 없는 곳/ 그 밖의 모든 것이 있는 곳/ 우리의 일생이 있는 곳/ 그러므로 언제나 정시에 문을 닫는/ 동사무소에 가자// 두부처럼 조용한 오후의 공터라든가/ 그 공터에서 혼자 노는 바람의 방향을/ 자꾸 생각하게 될 때/ 어제의 경험을 신뢰할 수 없거나/ 혼자 잠들고 싶지 않을 때/ 왼발을 든 채/ 궁금한 표정으로/ 우리는 동사무소에 가자”(‘동사무소에 가자’ 부분)

이장욱은 우리에게 동사무소를 불쑥 내민다. 동사무소는 서류 한 장으로 우리의 살아있음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이 시에서는 시적 화자가 동사무소를 찾는 동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제의 경험을 신뢰할 수 없을 때’ 동사무소에 가자는 것이다. 문제는 왼발을 든 불편한 자세로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왼발이란 이데올로기가 세계를 좌우로 양분했던 20세기의 좌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왼발을 사용하지 말고 동사무소에 가자고 권유하고 있다. 왜 하필 동사무소인가.

그곳은 출생신고에서 사망신고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이 집약된 곳이다. 시작과 끝이 간결한 곳이 동사무소이다. 게다가 인생에서 제기되는 모든 질문들이 없는 곳, 다시 말해 ‘왜 살아가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장소이기도 하다. 질문이 없는 세계란 다름 아닌 세계의 끝이다.

여기에 반전이 있다. 이장욱은 유머러스한 화법으로 동사무소라는 ‘세상의 끝’에서 다시 질문은 시작돼야 하고, 세상은 다시 시작돼야 한다는 ‘양날의 칼’을 우리 손에 쥐어주고 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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