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종교개혁 순교 역사의 생생한 기록자 존 폭스 (上)
‘순교자 열전’ 저술해 피로 쓰여진 종교개혁의 역사 증언
윈체스터의 주교 가디너의 박해를 피해 몰래 도망간 이 가정교사는 존 폭스(John Foxe, 1517∼1587)였다. 그가 탄 배에는 임신한 아내 이외에도 그의 소중한 원고가 실려 있었다. 그 원고는 에드워드 6세 통치기간인 1552년부터 쓰기 시작한 ‘활동과 기념비(The Acts and Monuments)’ 의 초안이다.
‘활동과 기념비’는 나중에 ‘폭스의 순교자 열전’으로 알려진 책이다. ‘폭스의 순교자 열전’은 개신교 최대 고전 중의 하나이다. 만약 그때 그가 잡혔더라면, 이 개신교 최대 고전은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폭스의 순교자 열전’이 없었더라면, 토머스 크랜머가 화형 당하기 전 자신의 오른손을 먼저 불에 태운 사건이나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다 화형 당한 윌리엄 틴데일에 대한 사건의 실상을 제대로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배에 가지고 갔던 초안에는 피의 메리 시절에 박해 받았던 이와 같은 종교개혁자의 순교 이야기는 아직 없었다. 그때는 피의 메리에 의한 본격적인 박해가 막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대륙으로 건너간 뒤 그는 영국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박해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그는 당시에 벌어졌던 박해에 관한 자료와 증언을 모아 ‘순교자 열전’을 펴내기로 결심했다. 그는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시시한 정보라도 계속해서 수집해 조사했다.
그는 평생 ‘순교자 열전’을 4번이나 개정해 펴냈다. ‘순교자 열전’은 성서 분량의 대작이다. ‘순교자 열전’을 통해 그는 종교개혁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와 희생 속에서 이루어진 것인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러면 존 폭스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1517년에 영국 링컨셔 주의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집안이었지만,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재혼하는 바람에 의붓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그의 나이 16세 때인 1534년에 옥스퍼드 대학의 브레이스노즈 컬리지에 입학했다. 그리고 다음 해 모들린 컬리지의 장학생으로 선발될 정도로 공부에 뛰어났다. 그는 1537년에 학사 학위를, 1543년에는 석사 학위를 받았고, 1539년부터 40년까지 대학의 논리학 강사로 활동했다. 그는 그리스와 라틴 교부들의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고전 언어에 뛰어났다. 특히 히브리어에는 뛰어난 역량을 보였다. 고대와 현대의 로마 가톨릭교회사 및 교회 법령이 어떻게 발단했고 진행되었는가를 조사하는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폭스의 학문적 관심과 이력을 볼 때 당시에 불던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의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뛰어난 학문적 능력과 남다른 학문적 열정을 가졌지만, 폭스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의 종교개혁적 신앙은 말년에 헨리 8세가 1539년에 선포한 ‘6개 신조’인 교회 법령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쫓겨나게 된 일화를 소개하면 이렇다. 그는 밤마다 조그만 숲 외딴 나무 그늘을 찾아가 북받치는 슬픔을 참지 못해 많은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곤 했다. 아마 신앙의 변화로 인해 마음속 갈등이 심했던 것 같다. 이렇게 밤마다 으슥한 곳을 찾아가 기도 드리던 그를 교회 당국은 수상하게 여겼다. 추궁을 당하던 폭스는 솔직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결국 그는 대학 당국으로부터 이단으로 낙인 찍혀 1545년에 퇴교를 당했다.
또 다른 일화에 의하면, 그가 성직자의 독신에 반대해서 퇴교를 당했다고 한다. 그는 친구에게 보내는 한 편지에서 성직자의 독신주의를 자기 거세라고 신랄한 표현을 써가며 비판했다. ‘6개 신조’에서 성직자는 독신으로 살아야 하며, 이를 어길 시 화형에 처한다고 선언했었다.
폭스는 대학에서 쫓겨나고, 이단으로 낙인 찍혀 목숨도 위태로웠다. 종교개혁적 신앙 때문에 보장된 학자로서의 성공적 삶을 포기한 뒤 찾아 온 것은 극심한 궁핍이었다. 딱한 처지에 놓인 그를 도와줄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가족에게서도 외면 받는 처지가 되었다. 그때 위릭셔 주의 토머스 루시 경이 그를 아이들의 가정교사로 초빙했다. 루시 경은 유력한 정치인이자 열성적 프로테스탄트였다. 그는 셰익스피어와 얽힌 일화로 유명하다. 어떻게 보면 그는 셰익스피어가 대문호가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셰익스피어는 양털 깎는 일을 하며 지냈다. 그런데 양털 깎는 솜씨가 형편없어 목장 주인에게 호된 핀잔을 듣는 적이 많았다. 그렇게 양털을 깎던 시절에 그는 친구들과 함께 루시 경의 정원에 몰래 들어가 사슴과 토끼를 잡다가 걸린 적이 있었다. 그는 매질을 당하고 갇혔다. 곤욕을 치르고 겨우 풀려난 그는 루시 경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시를 적어 정원에 붙여 놓았다. 이를 본 루시 경은 분노해 그를 고향에서 추방해 버리고 말았다. 고향을 등진 그는 런던 극장에서 연극 대본을 쓰는 일을 하게 되었고, 결국 세계적인 문호가 되었다. 고향을 등진 일이 그에게는 불행이었지만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만약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셰익스피어는 계속 그곳에서 양털을 깎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폭스는 루시 경의 가정교사 시절, 아그네스 랜달(Agnes Randall)이라는 처녀와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루시 경의 집에서도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로마 교회의 심문관들이 이단자인 그를 추적했기 때문이다. 잡히면 이단으로 화형 당할 수도 있었다. 그는 우선 장인에게 의탁한 다음 의붓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가서 숨어 지냈다. 처음에 의붓아버지는 잡히면 사형 당할 폭스가 집에 오는 것에 반대했다. 그러나 폭스가 집에 오자 따뜻하게 맞아 주고 숨겨주었다.
그 사이 헨리 8세가 죽고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하자 상황이 나아졌다. 폭스는 런던으로 옮겨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그의 삶은 궁핍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던 그에게 기적처럼 일자리가 주어졌다. 기나긴 굶주림에 지쳐 있던 그는 성 바울 교회에 앉아 기도를 했다. 그때 낯선 사람이 그의 곁에 와 앉았다. 그는 가난한 폭스를 위로하면서 장래의 생계를 책임 질 새로운 후원자가 곧 나타날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돈도 쥐어 주었다. 폭스는 너무나 고마웠지만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리치먼드 공작 부인에게서 폭스는 서리 백작(Earl of Surry)의 자제들을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당시 서리 백작은 런던탑에 갇혀 있었기에 누이인 리치먼드 공작 부인이 조카들의 교육을 맡고 있었다. 폭스는 프로테스탄트 지식인들 중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갖춘 사람으로 알려져 있어 그녀가 눈여겨 보았던 것이다. 폭스가 교회에서 만난 낯선 사람도 그녀가 보낸 사람일 수 있었다.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된 폭스는 교회가 받았던 박해와 순교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는 헨리 8세 때 종교로 인해 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박해 받고 처형 당하는 것을 보아 왔다. 그는 종교로 인해 사람들이 핍박 받고 처형 당하는 것에 반대했다. 에드워드 6세 치하 때에도 종교를 이유로 화형이 거행되자 그는 그것을 막고자 백방으로 노력했다. 종교 박해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는 기독교가 겪어온 박해를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로마 시대 때 자행된 종교 박해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쓰게 될 피비린내 나는 종교 박해와 순교의 사건들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고 있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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