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의 고향]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
나의 고향은 전북 남원군 이백면 초촌리이다. 남원은 이몽룡과 춘향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와 서편제의 구성진 가락이 숨쉬는 곳이다. 그래서 이어령 교수님은 나의 저서 ‘꽃을 피우는 건 꿈꾸는 나비’ 추천사에서 “소강석 목사는 예향(藝鄕)의 마을 남원 출신이기에 목회자이면서 동시에 시문(詩文)에 능하고 풍류와 흥이 있으며 거친 남도 사내의 야성이 있다”고 소개한 바 있다. 나의 고향은 어릴 때만 해도 두메산골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을 남원 지리산 산자락에서 보내면서 평생 돈으로 살 수 없는 값진 것들을 많이 배웠다. 그것은 검정 고무신을 신고 산천을 마음껏 뛰어 다니면서 느꼈던 목가적 감성과 할머니와 어머니, 누나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으면서 갖게 된 풍부한 상상력이다.
예향에서 감수성 얻고 항구에서 믿음의 항로를 열다.
예향에서 감수성 얻고 항구에서 믿음의 항로를 열다
그 어린시절 들었던 이야기들 때문에 나에게는 독특한 상상력과 창의력, 문학성이 길러졌다. 즉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게 하는 ‘내러티브의 힘’이 생겼다. 목회자로서 설교를 할 때도 이야기 설교를 한다. 어떤 딱딱한 교리나 이론적인 설교를 해도 이야기로 들린다. 어린 시절 자연스럽게 익혔던 고전 독서와 이야기들은 글쓰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초등학교 글짓기 대회에 나가 고향인 남원 전체에서 1등을 했다. 5학년 6학년 때는 웅변대회와 고전 읽기 대회에 나가 전라북도에서 교육감상을 받기도 했다. 웅변대회에 나가서 이승복 이야기나 어머니 은혜 등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엉엉 울어 버릴 정도였다. 할머니, 어머니, 누나들은 정말 연약한 여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분들은 나를 놀라운 이야기의 세계로 인도한 위대한 안내자였다.
군산, 내 영혼의 첫 사랑
나는 남원 읍내에 있는 중학교를 졸업한 후 군산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군산에서 내 평생을 다해 섬길 영혼의 주인, 주님을 만났다. 그런데 내가 처음으로 교회를 가게 된 것은 아주 웅장한 깨달음이나 목적 때문이 아니라 조금은 유치하고 아주 사소한 계기가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1년 후배가 자꾸 꼬드겼다. “형! 교회 한번 와보세요. 예쁜 여학생이 있어요. 형에게 소개시켜 줄게요.” 그 소리를 자꾸 듣게 되자 은근히 마음이 끌렸다. 그래서 그 일로 군산 명석교회(현 군산 사랑의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정말 교회를 처음 나가자마자 눈에 띄는 여학생이 있었다. 얼굴도 예뻤고 시도 잘 썼으며 웅변도 노래도 잘했다. 더구나 그 여학생은 나와 같은 나이에 생일도 같았으며 태어난 시(時)도 똑같았다. 묘한 인연이라 생각하며 서로 금방 가까워졌다.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부지런히 교회를 나가던 어느 날, 나는 예수님과의 뜨거운 만남을 체험하게 되었다. 사실 처음으로 교회에 가게 된 것은 어떤 면에서 불순한(?) 동기였지만 난 정말 그곳에서 가슴을 활활 불살라버리는 진정한 영혼의 사랑을 만났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은혜를 받고 신학교를 가서 목사가 되기로 결심을 하자 집에서 난리가 난 것이다. 누구보다 독실한 유교적 가풍을 중시하셨던 아버지께서 노발대발하셨다. “자식이 예수 믿는 것도 못마땅한데 목사가 된다니, 우리 가문에 무슨 저주란 말이냐. 그렇게 밥 먹고 살 직업이 없어서 하필 내 자식이 목사가 되려고 하다니….” 아버지는 분을 못 이기셨다. 그래서 까딱하면 몽둥이로 두들겨 패며 때로는 메주를 달아놓는 곳에 나를 묶어놓고 매질을 하기도 했다.
어머니도 나를 회초리로 때려보기도 하고 회유도 하셨다. 공무원이던 큰형님도 목구멍에 풀칠할 것이 그렇게도 없느냐고 야단하셨다. 결국 그 해 겨울 눈보라가 심히 몰아치던 날, 어머니께 회초리를 맞다가 마침내 집을 뛰쳐나오고야 말았다. 매를 맞다가 엉겁결에 집에서 뛰쳐나오다 보니 내의도 못 입고 양말도 못 신은 채 봄 점퍼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그 추운 날 10원 한 푼도 없이 손에는 오직 성경 찬송뿐이었다. 한참을 걸어 읍내 가기 전에 있는 폐문리 다리에 도착했다. 다리 위에 앉아 갈급한 심정으로 성경을 펼쳐 시편 121편을 읽었다. 순간 다시 한 번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때의 성경 구절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화순, 영혼의 용광로 불꽃 속으로
그렇게 집에서 쫓겨나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감동을 따라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광주로 갔다. 그곳에서 당시에는 인가도 나지 않은 무인가 신학교인 광주신학교(현 광신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나의 가슴에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과 꿈이 있었다. 광야의 야성이 꿈틀거렸다. 그래서 20대 청년 시절, 모두가 다 반대하던 화순 백암리에 들어가서 교회를 개척했다.
불타는 꿈과 소명감으로 온몸을 던져서 목회를 하자 교회가 점점 부흥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점점 마을 사람들의 저항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조그만 젊은 전도사 한 명이 들어와 동네 사람들을 꾀어 조상 제사를 못 지내게 하고 부락 전통을 못 지키게 한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동네 한가운데에 교회를 지으면 그 마을의 복이 떠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백암리 부락 유지들은 온갖 핍박을 하였다.
교회를 나간 사람들에게 벌금을 물리는가 하면 교회에 와서 오물을 뿌리고 천막 교회에 화약을 던져 구멍이 나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차임벨 줄까지 끊어버렸다. 어떤 때는 남녀노소 100명, 200명이 술을 먹고 와서 나의 멱살을 잡고 행패를 부렸다. 교인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나가 30명도 채 안되었고 그렇게 많던 주일학교 학생들도 40∼50명밖에 안 남았다.
부락 사람은 교회로 빌려준 빈집 주인에게 압력을 넣어 그 집에서마저 쫓겨나게 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교인 집 옆방을 얻어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었다. 겨울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에도 산에 올라가서 기도했다. 찬 겨울바람에 몸이 덜덜 떨리고 손바닥이 얼음장처럼 차가왔다. 어느새 손등으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말이 안 되면 몸으로, 몸이 안 되면 영혼으로 부딪치며 영혼의 승부를 펼쳤다. 그래서 결국 모든 사람들이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던 그곳에 화순백암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내가 만약 20대 청년시절 화순에서의 첫 교회 개척에 실패했다면 오늘과 같은 큰 목회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의 연단과 훈련이 있었기에 나의 소명감은 더 불타올랐고 영성은 금강석처럼 더 단단해졌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대하는 유연한 리더십, 사랑과 섬김의 포용력을 갖추게 되었다. 남원에서 군산으로, 군산에서 다시 화순으로, 화순에서 서울로…. 오늘날의 내가 있기까지 내 영혼을 연단하고 훈련하였던 고향이었다.
●소강석 목사
1962년 전북 남원 출생. 광신대학교와 개혁신학연구원 및 동 대학원, 칼빈대 신대원과 총신대 신대원을 거쳐 미국의 낙스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2006년 한국기독교출판문화 최우수상 수상작인 ‘신정주의 교회를 회복하라’ 등 다수가 있다. 5권의 시집도 출간했다. 한국기독교선교대상(목회자부분), 목양문학상, 기독교문화대상(문학부문), 마틴루터킹 국제평화상, LA 오렌지 카운티 의회 특별공로상,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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