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지배자 기억을 지운다… 건축물 파괴하는 정복자들
집단기억의 파괴/로버트 베번/알마
유대인 문화의 상징 보우파 마을의 목조 시너고그, 1500년 역사를 가진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석불. 모스타르의 역사적인 다리 스타리 모스트, 뉴욕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 테러나 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파괴되거나 원형이 훼손된 역사적인 건축물이다.
영국의 건축 잡지 ‘빌딩 디자인’ 편집인 출신의 건축 저널리스트 겸 저술가인 로버트 베번은 인도에서 보스니아까지, 요르단 강 서안에서 아일랜드까지 무수한 문화파괴 현장을 직접 둘러봤다. 그리고 정복자들이 어떤 이유에서 한 집단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해 건축물을 파괴해왔으며 지금도 파괴를 계속하는지 설파한다. “최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후방에서조차 흔히 수행되는 이 전략의 목적은 정복을 강화하기 위해 승자의 입맛대로 역사를 고쳐 쓰는 데 있다. 여기서 건축물은 토템의 성격을 띤다. 예컨대 적의 모스크는 단순한 모스크가 아니라 말살하려는 집단의 현전(現前)을 상징한다. 도서관과 미술관은 역사적 기억의 저장고이자 특정 집단의 현전을 과거와 잇고 현재와 미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증거다. 이런 이유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 구조물과 장소는 의도적으로 선택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8쪽)
저자는 “자신들의 건축 유산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광경을 본 이들이 받는 상실감은 그 구조물이 지닌 미학적 가치가 훼손되는 데서 느끼는 슬픔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며 “친숙한 사물을 모두 잃는다는 것, 즉 한 개인을 둘러싼 환경이 남김없이 파괴된다는 것은 그 사물들이 불러일으키는 기억으로부터 추방당해 방향감각을 상실함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문화청소의 사례들
#사라예보 모스타르의 다리는 보스니아 내전으로 파괴되거나 심각한 피해를 입은 오스만제국 시대의 건축물 수천 개 가운데 한 곳에 불과하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사이에 끼어 가장 큰 화를 입은 대상은 오스만제국의 유산이었다.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건물의 피해가 가장 커서 도서관, 박물관, 묘지, 분수 등이 주요 표적이 됐다.
#아르메니아는 4세기 초 기독교를 받아들인 최초의 기독교 국가였다. 하지만 1894∼1896년 술탄 아브뒬하미드 2세의 주도로 일어난 집단학살로 인해 아르메니아 심장부인 터키 동부 전역에서 20만 명에 이르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살육되고 수천 명이 추방되거나 강제 개종 당했다. 이 과정에서 아르메니아 교회와 기념물, 거주 지구와 도시가 파괴됐다.
#더블린 리피 강변의 법원 건물 포 코츠(Four Courts)는 1922년 부비 트랩으로 설치된 지뢰가 폭발하며 파괴됐다. 아일랜드 자유국 수립을 위한 조약 체결에 반대해 포 코츠 내부에 숨어 있다가 포위된 공화국군(IRA) 대원들이 설치한 지뢰였다. 지뢰는 IRA군이 마이클 콜린스의 자유국군에 투항한 다음 터졌는데, 자유국군은 이 기념비적 건축물을 부수기 위해 영국군 대포까지 동원했다.
#2001년 9월 11일, 주도면밀하게 선택된 목표물인 세계무역센터의 파괴는 미국은 물론 이슬람 세계에도 분명하고 구체적인 메시지를 보냈다. 분명한 사실은 이슬람 근본주의가 오랫동안 우상과 우상 숭배, 신성한 공간과 기하학적 구조에 관심을 갖고 무슬림에게 메카의 성스러운 모스크를 해방시킬 것을 반복적으로 촉구해 왔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다른 종교에 너그러운 편이었던 오스만제국에서도 모스크의 돔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교회 첨탑이 자주 경계의 대상이 됐다. 9·11테러 이후 작성된 기밀보고서에 따르면 테러리스트들이 점찍어둔 상징적 목표물에는 에펠탑과 금문교, 디즈니랜드, 바티칸, 멜버른의 리알토 타워, 런던의 도클랜드 내 고층빌딩이 포함돼 있었다.
#2002년 4월, 이스라엘군은 역사적인 도시 나블루스를 침공해 팔레스타인 유산에 가장 큰 피해를 주었다. 기원전 71년까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이 도시에는 로마 시대, 비잔티움 시대, 십자군 시대, 맘루크 왕조와 오스만제국 시대에 지어진 석조건물들이 들어차 있었다.
보호와 기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문화유산이 대거 파괴되자 그 대비책으로 1954년 ‘분쟁 지역 내 문화재 보호협약’인 헤이그협약이 등장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은 전 세계에서 이 협약에 가입하지 않은 소수 국가 중 하나다. 미국이 헤이그협약에 서명했다면 이라크 점령지에서 기념물과 문화재를 공격하지 않아야 함은 물론 이를 보호해야 할 법적 의무를 졌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이 협약을 외면했다.
저자는 “문화유산 보호를 규정한 국제법이 실제 유산을 보호하는 데 명백히 실패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서명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아 보일 수도 있다”며 “공동체의 건축 유산을 파괴하는 행위가 용납될 수 없다는 분위기가 형성되려면 옛 유고슬라비아 전범 재판과 이런 범죄를 저지른 이들의 재판에 중형이 선고돼 ‘억지 효과’를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건물을 세운 사람은 사라지고 없다 해도 죽은 건물은 사어(死語)처럼 슬픈 웅변이 될 수 있다. 분쟁의 한복판에서 보호에 대한 약속이 헌신짝처럼 버려진 20세기의 역사가 21세기에 또 다시 되풀이될지 아닐지는 다음 몇 년 안에 판가름이 날 것이다.” 나현영 옮김.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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