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윤복희 (5) 안골서의 평안도 잠시… 다시 유랑극단 속으로
충청도 안골이라는 시골 마을은 내게 소중한 곳입니다. 어릴 때부터 무대와 길거리를 전전하던 내가 짧은 기간이지만 풋풋한 자연 속에서 아름다운 추억을 만든 곳이니까요. 배 다른 언니와 뒷동산에 올라가 동요를 부르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흐뭇하답니다. 유행가와 팝송만 줄줄 외워 부르던 내게 색다른 재미였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항상 안골이 그립습니다. 아카시아 나무 이파리를 하나씩 뜯으며 걷던 시골길도 그립고, 들꽃으로 목걸이를 만들고 머리를 장식하던 생각도 납니다. 뭐니 뭐니 해도 천안장터로 가면서 걷던 언덕길이 자주 생각납니다. 커다란 나무와 응달, 자지러지게 울어대던 산새들, 무덤처럼 적막하던 산그늘, 온갖 열매를 조롱조롱 매달던 나무들…. 고향은 아니지만 고향 이상으로 내 마음에 아름다운 노랫가락을 만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안골이 내게 남긴 강한 인상은 따로 있습니다. 큰엄마의 기도에 진력하셨던 모습입니다. 큰엄마를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그분의 기도 덕분에 배 다른 오빠 언니가 어려운 형편에도 잘 성장해 하나님의 일꾼이 됐습니다. 큰오빠 윤영기 목사님은 충남 강경에서 목회를 하고 계시고, 언니도 전도사로서 열심히 주님의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친오빠인 가수 윤항기씨도 목사가 됐고, 나는 찬양사역자로서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안골을 떠나자 나는 다시 떠돌이별이 되었습니다. 30여명으로 된 낙랑악극단의 일원이 돼 구름처럼 바람처럼 전국을 떠돌았습니다. 악극단 공연에는 ‘윤부길과 천재소녀 윤복희’라는 타이틀이 걸렸습니다. 어린 내가 악극단의 간판스타가 된 거죠.
그렇게 2년 넘게 다니다보니 유랑생활에 조금씩 싫증이 났습니다. 아버지가 다시 아편을 하는 것도 싫었습니다. 공연을 하기 위해 부산에 내려가 있던 어느 날, 악극단을 탈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버지와 단원들 몰래 부산역으로 가서 무작정 서울행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검표원을 피해 다니다 대전에서 내리게 됐습니다. 참으로 막막했습니다. 그런 차에 황정자 아줌마가 속한 유랑극단이 대전에서 공연 중이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줌마는 그때 아버지가 노랫말을 쓴 ‘처녀뱃사공’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었죠. 나는 무작정 아줌마를 찾아 나섰습니다.
대전은 생각보다 넓었습니다. 늦가을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물어물어 온 종일 헤매다 겨우 유랑극단 숙소를 찾았습니다. 아줌마는 나를 따뜻하게 맞아 주셨습니다. 근데 뜻하지 않은 일이 터졌습니다. 극단의 무용수 언니들 사이에 끼여 자고 일어났는데, 졸지에 도둑으로 몰린 겁니다.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단원들은 나를 도둑으로 지목했습니다. 난생 처음 경찰서까지 가게 됐습니다.
경찰서에서 참 희한하고도 절묘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내 앞에 앉은 경찰 아저씨의 모습이 무섭기는커녕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내가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고 울면서 호소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저씨가 아버지 이름을 물었습니다. 내가 아버지 성함을 대자 놀라는 표정의 아저씨는 부길부길 쇼단의 윤부길씨냐고 되물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아저씨는 나를 덥석 껴안았습니다. 그때부터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아저씨는 나를 데리고 나가 밥을 사주고는 서울행 기차표와 용돈까지 쥐어줬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아이 입에서 나온 말이라곤 나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습니다. 훗날 내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뻗쳐주신 그분의 선한 손길 가운데서 특별히 강한 인상을 남긴 에피소드입니다.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9)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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