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손수호] 울산공단 50년의 명암
공업센터 지정 50주년을 기념하는 번영탑이 3일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KTX 울산역 광장에 위용을 드러냈다. 제목은 ‘회귀, 그리고 비상’. 티타늄 소재로 수면에서 하늘로 솟구치는 고래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2009년 환경조형물 현상공모에서 최고상을 차지한 박종만씨의 작품이다. 67년에 건립한 톱니모양의 공업탑에 비해 훨씬 세련됐다. 길이 34m, 폭 12m, 높이 11m 규모라니, 국내 조형물 가운데 가장 큰 축에 속한다.
‘한국경제의 고래’를 상징하는 조형물처럼 울산은 한국 산업의 중심이다. 1962년 2월 3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4000년 빈곤의 역사를 씻고 민족 숙원의 부귀를 마련하기 위하여” 울산을 공업센터로 지정했다. 기후, 용수, 항만 등 공단의 조건이 뛰어나다는 이유였다. 이후 근대화의 중심에 서면서 인구 8만 5000명의 군이 114만 명의 광역시로 발전했다. 공장은 8개에서 1989개, 시 예산은 1100만원에서 2조9902억원으로 늘어났으며, 1인당 소득은 1627만원으로 전국 1위다.
돌이켜보면 예전의 울산은 상업지구와 농촌, 어촌이 어우러진 소읍이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2008년에 펴낸 ‘조선의 농촌위생’은 1936년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학생이 경상남도 울산읍 달리(達里)에 한 달 간 머물면서 식량과 영양, 주택, 인구구성, 체격과 발육, 질병 등을 적은 기록이다. 식민지 조선의 민중생활을 조사하는 표본으로 도시도 농촌도 아닌 울산이 선정된 것이다. 보고서에 적힌 20∼50세 주민의 평균 키는 남자 164.51, 여자 152.05㎝ 였다.
지금 울산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75년만의 귀향, 1936년 울산 달리’전도 이 때 수집한 민구(民具)가 대부분이다. 일본국립민족학박물관이 ‘울산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소장하던 유물은 참빗부터 등겨메주까지 다채롭기 이를 데 없다. 생업, 식생활, 의생활, 주생활로 나누어 모아 놓으니 ‘식민지 조선 농촌의 타임캡슐’에 다름 아니다. 달리는 현재 울산의 신시가지 중심부를 구성한다.
그러나 국가경제의 비약적 성장에는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급작스레 공단이 들어서면서 동네들이 하나 둘 사라졌고 주민들의 삶은 뿌리째 흔들렸다. 1970년대에 온산공단 건설 때는 이주문제로 홍역을 치렀으며, 한동안 공해에 몸서리쳤다. 또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 댐이 들어서면서 수많은 수몰민을 만들어 냈다. 국민들은 옛 울산 사람들에게 조금씩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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