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이어준 만찬의 기적…‘바베트의 만찬’

바베트의 만찬/이자크 디네센 글·노에미 비야무사 그림/문학동네

노르웨이의 조그만 산골 마을. 마르티네와 필리파 자매가 살고 있다. 자매의 아버지는 독실한 교파를 일군 목사이자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하지만 목사가 죽은 후, 신도 수는 줄고 그나마 남은 늙은 신도들도 서로 다투는 일이 잦다.

젊은 시절 언니 마르티네는 잘생긴 청년 장교 로벤히엘름의 사랑을 받았으며,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동생 필리파는 유명한 가수 아실 파팽에 대한 추억을 지니고 있다. 그런 자매에게 어느 날 낯선 프랑스 여인이 아실 파팽의 편지를 들고 찾아온다.

“나를 기억하시겠소? 그대들을 생각할 때마다 내 가슴은 백합이 가득 피어 있는 산골짝이 된다오! 이 프랑스 남자의 이런 정성 어린 마음이 한 프랑스 여인의 목숨을 구하게 될는지요? 이 편지를 전하는 사람은 바베트 에르상 부인입니다. 부인을 자비롭게 받아주리라 믿소.”(26∼28쪽)

자매는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바베트를 받아들이고, 바베트는 자매의 집안일을 도우며 함께 지낸다. 바베트는 자신의 과거를 입에 올리는 일이 거의 없지만, 알뜰한 살림 솜씨로 자매와 마을 사람들에게 점차 신뢰를 얻는다.

그들과 함께 생활한 지 12년이 지난 어느 날, 바베트는 만 프랑짜리 복권에 당첨된다. 죽은 목사님의 100번째 생일 만찬을 자기 돈으로 차리게 해달라는 바베트의 간청을 마지못해 받아들인 자매는 신도들과 미리 만나 바베트가 만찬에 어떤 요리를 내와도, 음식에 관한 말은 일절 꺼내지 않기로 약속한다. 젊은 시절 마르티네를 짝사랑했던 로벤히엘름도 이제는 장군이 돼 그 지역에 우연히 들렀다가 만찬에 초대된다.

만찬에 초대된 사람들이 모두 촛불 밝힌 테이블에 둘러앉고, 한때 프랑스에서 천재 요리사로 활약했던 바베트가 혼신을 기울인 음식을 내놓는다. 궁정 생활에 익숙한 로벤히엘름은 노르웨이 산골 마을에서 그런 진귀한 요리가 나오는 것에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지만 늙은 신도들은 자신들의 맹세를 되새기며 묵묵히 수저만 기울인다. 그러나 먹고 마실수록 사람들 사이에는 사랑과 온기가 퍼져나가고, 그들은 놀라운 축복을 경험한다.

“그 후에 일어난 일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손님들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마치 수많은 작은 후광들이 하나로 합쳐져 거룩한 광채를 내기라도 한 듯 천상의 빛이 집 안을 가득 메웠다는 것 외에는. 말수가 적은 노인들은 말문이 틔었고, 수년간 거의 듣지 못했던 귀가 열렸다. 시간은 영원 속으로 녹아들었다.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각, 창문이 황금처럼 빛났고 아름다운 노래가 바깥의 겨울 공기 속으로 흘러나갔다.”(66∼67쪽)

성경과 아라비안나이트, 북유럽의 전설과 민담의 세계를 자유로이 오가는 이 소설작품은 한 편의 우화 같다. 만찬 한 번을 위해 만 프랑을 다 써버린 바베트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매를 향해 바베트는 이렇게 말한다. “마님들을 위해서라고요? 아니에요. 저를 위해서였어요. 저는 위대한 예술가라니까요. 위대한 예술가는 결코 가난하지 않아요.”(74쪽)

필리파는 한참동안 아무 말도 못하다가 속삭인다. “난 알아.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천국에서는 바베트가 하나님께서 바베트를 지으신 그대로 위대한 예술가로 남을 거야.”(75쪽)

이렇게 말한 필리파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으로 끝맺는 이 작품은 냉담한 마을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그들이 잊고 살던 신의 축복을 되새기게 해줄 뿐만 아니라 예술이 삶에서 일으킬 수 있는 기적을 보여준다. 그리고 베풂 없는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바베트가 차린 한 끼의 만찬은 얼어붙은 영혼까지 녹여냈던 것이다. 단 한번의 만찬을 위해 거리낌 없이 전 재산을 쏟아 붓고도 오히려 행복해 하는 바베트의 음식이야말로 진정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종교와 예술은 하나로 완성된다. 둘은 유리되지 않는다. 바베트는 바깥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다.

‘바베트의 만찬’은 1987년 덴마크에서 영화로 만들어져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런던비평가협회 외국어 영화상 등을 수상했다.

이자크 디네센은

1885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카렌 블릭센. 필명인 이자크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 이삭(‘웃음’이라는 뜻)에서 따왔다. 28세에 브로르 폰 블릭센 남작과 결혼해 남작 부인이 되고 케냐의 커피 농장주가 된다. 이때 영국인 사냥꾼 데니스 핀치 해튼을 만나게 되지만 커피 값 폭락으로 농장을 잃고, 비행기 사고로 연인인 해튼까지 잃은 그녀는 미국 뉴욕에서 작가 생활을 시작한다.

유명한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뉴욕에서 쓰여졌고 영화로도 제작돼 메릴 스트리프와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을 맡았다. 그녀는 1954년과 1957년, 두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비록 상은 헤밍웨이와 카뮈에게 돌아갔지만, 헤밍웨이는 그녀가 상을 탔어야 한다는 수상 소감을 남김으로써 디네센의 작품세계에 경의를 표했다. 1962년 수술 후유증으로 인한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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