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백석을 찾아서] ② 등단 전후… 그리고 시집 ‘사슴’
겨레 방언을 詩語로… 현대시 100년 최고시집 펴내
소년 백석은 1918년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소학교에 입학한다. 소학교 시절 그의 자취를 어림할 수 있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당시는 1919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3·1만세사건으로 말미암아 오산소학교 역시 소용돌이치던 시기였다. 일본 헌병들에 의해 교실은 불타고 학교는 1년6개월 동안 문을 닫아야 했다. 학생들의 항일정신이 점점 높아가던 1924년 백석은 고당 조만식이 교장으로 있던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다. 오산고보 4학년 때인 1927년 가을 수학여행 도중, 경성에 머물던 소회는 훗날 그가 관여한 잡지 ‘여성’(1938년 3월호)에 실려 있다. 백석은 경성의 첫 인상에 대해 “건건쩝쩔한 냄새가 나고 황혼녘 같은 서글픈 거리”라고 묘사하고 있다. 전차를 타려고 학교 친구와 같이 있다가 친구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전차가 오는 바람에 차장에게 기다려달라고 해 사람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됐다는 내용도 있다. 백석은 1929년 3월 오산고보를 2회(통산 18회)로 졸업한 42명의 학생 가운데 1명이었다. 그 가운데 19명이 일본 유학을 가거나 대학에 들어갔으나 백석은 집안 형편 때문에 진학을 하지 못했다. 백석은 권토중래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인생의 반전은 이때 시작된다. 그가 쓴 단편 ‘그 모(母)와 아들’이 1930년 1월 5일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당선됐던 것이다.
백석은 이를 계기로 조선일보 부사장이던 정주 출신의 계초 방응모(1883∼1950)의 눈에 띄어 도쿄로 유학갈 수 있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3·1만세사건 직후 계초가 불타버린 오산학교 재건을 위해 동분서주할 때 백석의 아버지 백영옥이 기부금 모금책으로 활동했고, 두 사람과 조만식의 친분도 두터웠으니 백석은 계초에게 있어 지인(知人)의 자제이기도 했다. 일본 사립명문 아오야마(靑山)학원 영어사범과에 입학한 백석은 1학년 때 영어를 마스터한다. 2학년 때는 불어를, 3학년 때는 러시아어를 파고들었다.
백석 연구자인 송준(50·자유기고가)에 따르면 백석은 아오야마학원에 입학한 이듬해인 1931년 5월 15일에 학원 내 교회인 청학원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학교 친구인 아사히의 증언에 따르면 백석은 학교 교회에 출석하며 선교사들과 접촉을 꾸준히 하여 영어실력을 닦은 학생이었으며 아마도 그것이 바로 백석이 영어를 거의 완벽하게 마스터한 비결이었을 것이다. 백석의 3학년 때 주소는 동경 길상사(吉祥寺) 1895번지였다.”(송준 ‘시인 백석 일대기’)
아사히는 백석에 대해 “강렬한 매력을 지닌 우수한 친구이며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한 학생”으로 기억했다. 백석은 4학년 때 교생실습을 나간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후일 부임한 함흥영생고보 학생들에게 가끔 들려주었기에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교사자격증을 취득해 귀국한 백석은 학교가 아닌 조선일보사 출판부에 입사한다. 1934년 4월의 일이다.
평론가 백철(1908∼1985)은 당시 백석에 대한 인상을 ‘1930년대 문단’이란 글에서 이렇게 묘파했다. “처음의 백석에 대한 사내(社內)의 평판은 그렇게 호감적인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내게 말한 것인데 ‘사람이 새파랗게 젊어가지고 도도하기만 하단 말이야! 사장의 세력을 믿는 건가. 원 그러면서 시를 쓴다는 거야’ 하는 백석의 평을 들은 적이 있다. 백석은 본시 성품이 모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 대신 결벽성이 심한 데가 있었다.” 평북 의주 출신으로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귀국해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던 백철의 눈에 비친 백석은 도도했던 모양이다.
백석은 조선일보 계열 잡지 ‘여성(女性)’의 편집 업무에 종사하는 한편 조선일보 지면에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의 ‘임종 체호프의 6월’을 비롯한 여타 번역 원고들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그 가운데 1934년 8월 10일부터 9월 12일까지 8회에 걸쳐 발표한 러시아 비평가 미르스키의 논문 ‘죠이쓰와 애란문학(愛蘭文學)’은 백석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미르스키는 애란(아일랜드)의 극작가 존 밀링턴 싱이 게일어(Gaelic)가 뒤섞인 영어 방언을 쓰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 때문에 백석 역시 고향인 평안도 방언을 보편적인 시어로 써야겠다는 인식에 도달했던 것이다.
“그(싱)는 서부 애란의 가장 문화수준이 낮은 촌락의 전원생활을 그의 주제로 하여 완연히 독창적인 희곡을 냈다. 작중의 인물은 모두 인습에 젖은 농부들의 ‘앵글로 아이리쉬’ 방언(켈트계 영어)을 쓴다. 애란 농부들의 말 가운데 나오는 모든 영어의 정신과는 빙탄(氷炭)의 관계에 있는 것들을 극력 강조하고 또 이런 것들을 논리적인 조화의 체계 속으로 그는 그 문학적 방언을 창조하였다. 이 방언이야말로 실제 생활에 있어서는 아직 사용되어 본 적이 없는 것이다.”(‘죠이쓰와 애란문학’)
백석은 1935년 8월 31일 시 ‘정주성’을 발표하며 소설가에서 시인으로 변신한다. 당시 그는 정주를 배경으로 한 유년 시절의 애틋한 추억들을 그만의 방언주의와 독자적인 호흡에 담아 여러 편의 시를 쓰고 있던 중이었다.
“산(山)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헌겊심지에 아즈까지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잠자리 조을든 무너진 성(城)터/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魂)들 같다/ 어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산(山)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성문이/ 하늘빛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정주성’ 전문)
작품 끝에 8월 24일이라는 날짜가 명기돼 있다. 아마도 작품을 쓴 날짜일 것이다. ‘청배’는 푸른빛 도는 배로, 여름이 지나기 전에 조금 일찍 딴 배이다. 이숭원 서울여대 교수는 ‘메기수염의 늙은이’에 대해 “맛도 좋지 않은 청배를 팔려고 날마다 마을에 오는 고집 세고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 일종의 시대착오적인 인물”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고향을 ‘퇴락과 연민’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후 백석은 1935년 11월 창간된 잡지 ‘조광’에 시 ‘산지’ ‘주막’ ‘비’를 비롯해 ‘자연의 전당 대경성의 풍광’이라는 연재 코너에 산문 ‘마포’를 발표한다. 백석은 ‘조광’ 창간에 거의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여의도에 비행기가 뜨는 날, 먼 시골 고장의 배가 들어서는 때가 있다. 돛대 꼭두마리의 팔랑개비를 바라보던 버릇으로 뱃사람들은 비행기를 쳐다본다. 그리고 돛대의 흰 깃발이 말하듯이 그렇게 하늘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럴 때에 영등포를 떠나오는 기차가 한강철교를 건넌다. 시골 운송점과 정미소에서 내는 신년괘력(掛曆)의 그림이 정말이 되는 때다.”(‘마포’ 부분)
한강 나루변의 변화돼 가는 모습에 대한 정밀한 관찰이 아닐 수 없다. 백석은 1935년 가을, 마포 강변으로 산책을 나왔다가 오고 가는 소금 배와 여의도에서 솟아오른 비행기를 쳐다보며 생활의 시름을 달랬던 것이다.
마침내 백석은 1936년 1월 20일 첫 시집 ‘사슴’을 낸다. 이미 발표한 7편과 미발표시 26편을 합쳐 모두 33편이 실린 ‘사슴’은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발간됐다. 그해 1월 29일 서울 태서관(太西館)에서 열린 출판기념회. 백석의 첫 시집 출판기념회 발기인은 안석영 함대훈 홍기문 김규택 이원조 이갑섭 문동표 김해균 신현중 허준 김기림 등 11인이었다. 이 가운데 허준과 신현중은 후일 백석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약방의 감초 같은 존재였다.
‘사슴’은 100부 한정판이었으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서로 돌려 보면서 시집을 거의 통째로 암기했다고 한다. 시 ‘떠나가는 배’로 유명한 용아(龍兒) 박용철(1904∼1938)은 ‘사슴’을 이렇게 평가했다. “이 시집의 가치는 이 시편들이 울려 나오기를 토속학적 취미에서도, 방언 채취의 기호에서도 아닌 점에 있다. 외인(外人)의 첫눈을 끄으는 이 기괴한 의상(衣裳) 같은 것은 모든 이 시인의 피의 소곤거림이 언어의 외형을 취할 때에 마지못해 입은 옷인 것이다. 이 시집에서 감득할 수 있는 진실한 매력과 박력이 이 증좌(證左)다.”(‘조광’ 1936년 12월호 중 ‘시단 일년의 성과’) 박용철은 시인 백석의 앞날을 거침없이 축복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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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숭원(한국시학회 회장·서울여대 교수)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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