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종교개혁에 가장 큰 영향 미친 아우구스티누스 (下)
“인간이 원죄서 벗어나 구원받는 유일한 길은 은총”
기독교로의 개종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막 32세가 되던 때인 386년에 일어났다. 그는 ‘고백록’의 제8권에서 개종의 순간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했다.
개종을 앞 둔 그는 이제까지 함께 살아 온 여자들 그리고 세속적 쾌락을 추구했던 옛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자기와의 치열한 내면적 투쟁을 벌이던 중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자신이 추구했던 모든 것들을 끄집어내어 놓으니, 그것이 모두 한갓된 것이며, 수치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사로잡혀 무화과나무 아래에 엎드려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울다가 그는 어떤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이웃집에서 소년인지 소녀인지가 부르는 “tolle lege”(집어서 읽어라!)라는 노래 소리였다. 그는 그 소리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성경을 손에 들어 펼쳐 보았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성경 말씀은 사도 바울이 쓴 로마서 13장 13절이었다.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성경의 이 말씀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세속적 생활을 포기하고 기독교로 개종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는 잘 나가던 수사학 교수로서 부와 명예가 보장된 삶을 포기하고, 온전히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기 위해 금욕과 독신이라는 삶의 형식을 선택했다.
사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젊었을 때 우나라는 여인과 15년 동안이나 동거생활을 했었다. 18세 때 그는 이 여인에게서 아들 하나를 얻었다. 그가 이 여인과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는 법적인 신분 차이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그에게 신분에 맞는 다른 여자와의 결혼을 주선하면서 우나와 헤어질 것을 종용했다. 사실 당시 풍습으로는 우나를 첩으로 둔다 해도 별로 비난받을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별을 가슴 아파했지만,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금욕의 삶을 사는 것에도 자신이 없어 이별을 선택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에서 개종한 이후 2년 만에 북아프리카의 고향으로 돌아가 기독교 공동체에 헌신했다. 오늘날 알제리에 있는 북아프리카의 도시 타가스테가 그의 고향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이교도이자 로마관헌이었던 아버지 파트리찌우스와 열성 기독교신도인 어머니 모니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기독교인으로 개종할 때까지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어머니였다. 그녀의 열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처음에 기독교에 호감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9년 동안이나 마니교에 빠져 세월을 보냈다. 마니교는 페르시아의 예언자 마니에 기초하고, 후기 로마제국에 있어 영향력 있는 추종자들을 가졌던 종교공동체이다. 마니교도들은 세계가 서로 싸우고 있는 다른 두 개의 원리, 즉 선과 악의 원리라고 하는 이원론에 의해 지배된다고 보았다. 그들은 세계를 선의 영역과 악의 영역의 영원한 투쟁으로 이해했다. 그가 마니교에 이끌린 까닭은 마니교가 세상에 존재하는 악에 대해 설명하고, 고대철학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마니교와 결별하게 된 계기는 밀라노 주교였던 암브로시우스와의 만남이었다. 마니교도들은 그에게 밀라노에 있는 황제의 거주지에 수사학 교수 자리를 마련해서 그곳에 있던 암브로지우스와 상대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암브로시우스에게 이끌리게 되고, 결국 심적 변화를 일으키며 기독교로 개종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고 얼마 되지 않아 히포 레기우스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고백록은 주교로서 처음 보냈던 시절인 397년과 401년 사이에 쓴 작품이다. 원래 고백록 하면,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고백록은 고백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해 역사하는 하나님을 증언한다는 뜻도 함께 들어 있다. 그의 인생에 역사하는 하나님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것이 ‘고백록’의 뜻이라 할 수 있다.
고백록을 읽다 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개종 전후로 기독교의 원리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가 고민한 대표적인 문제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것이다. 당시 금욕적 삶을 살던 영국인 수도사 펠라기우스는 인간은 아무런 죄도 짓지 않고 자유롭게 태어났다는 주장을 했다. 그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 인간이 자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이렇게 주장한 배경에는 로마의 도덕적 타락이 있었다. 당연히 그는 구원을 받기 위해 금욕과 선한 행위를 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을 강조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다른 입장을 견지했다. 과연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또한 인간이 죄도 짓지 않고 자유롭게 태어났다면, 세상에 왜 악은 존재하는지, 왜 인간은 악을 범하는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나중의 기독교 이론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은총론’과 ‘예정론’을 들고 나왔다. ‘은총론’은 루터에게, ‘예정론’은 칼뱅에게 영향을 준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에 따르면, 아담만이 아무 죄 없이 자유롭게 태어났다. 나머지 인간들은 아담이 저지른 ‘원죄’ 때문에 자신에게 내재한 악의 성향을 갖고 있다. 인간은 원죄 때문에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며, 죄와 죽음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인간이 원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정론을 들고 나온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호의에 따라 구원 받을 사람들을 미리 예정해 놓았다. 이렇게 하나님이 미리 구원 받을 사람을 정해놓았다면 우리는 구원 받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인간이 행하는 최후의 결과를 미리 내다볼 수 있기에 예정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을 모르기에 은총을 기대하며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믿음’을 강조하지만 집요하게 문제를 파고들고, 회의하며 끝까지 확실성에 도달하고자 한다. 이런 그의 회의주의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를 앞선 것이다. 그는 고백록에서 자신의 경험을 반추하고 그 의미를 끝없이 물으면서 우리 내면 속에서 ‘진리’의 근원을 찾아 들어가며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밖으로 나가려 하지 말고, 그대 자신의 내면으로 되돌아가라. 진리는 인간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는 생애 말년에 로마 제국의 멸망을 목격하면서 ‘신국론’을 썼다. 이 책은 최초의 기독교적 역사철학서이자 정치철학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역사를 하나님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의 투쟁으로 파악한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가 대표하며 지상 나라는 국가가 대표하는데, 이 둘은 각각 다른 정신적 질서를 대변한다. 현실 역사에서 이 둘은 얽혀 있지만 종말에 이르면 이 둘은 분리돼 하나님 나라가 승리자로 등장한다. 430년 8월 28일에 죽기까지 아우구스티누스는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마지막 생애는 반달족의 침입으로 북아프리카 도시들이 유린되던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도시가 강탈되고 파괴되는 가운데서도 그의 서재만은 온전하게 보존돼 그가 쓴 작품들은 이후 서양의 정신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은총론▶ 인간들은 ‘원죄’ 때문에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이 원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예정론▶ 구원 받을 사람들을 미리 예정해 놓았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을 모르기에 은총을 기대하며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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