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서울 대림동 조선족 세계 르포
[미션라이프] 부정확한 한국말은 지하철 역사를 나오기 전부터 들렸다.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대화는 북한 말씨로 날이 서 있었다. 남의 말을 배워 쓰는 듯한 억양은 투박했다. 가끔 튀어나오는 중국어는 유창했다. 한국말을 할 때 삐걱대던 언어와 표정의 불일치는 중국어를 쓸 때 사라졌다. 생각과 감정은 중국어로 말해야 남김없이 드러나는 듯했다. 그들은 조선족으로 불리는 한국계 중국인이었다.
대림동
지난달 30일 오전 10시쯤 빠져나온 역사는 서울 지하철 2호선 대림역이었다. 육교 건너 6번 출구 아래에서 대림3동 대림로29길이 시작됐다. 280m쯤 떨어진 두암공원까지 곧게 뻗어있었다. 너비 7~8m의 길 좌우로 직업소개소, 여행사, 행정업무대행사가 즐비했다. 식당과 상점이 내건 간판엔 한글과 간체자인 한자가 섞여 있었다. 한글보다 한자가 컸다. 대부분 붉은 색이라 중국 분위기가 두드러졌다.
대림동은 조선족 밀도가 전국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지난 7월 말 기준 대림1~3동의 조선족이 1만5736명이라고 영등포구는 7일 밝혔다. 외국인과 한국인을 합친 주민 8만1449명의 19.3%다. 5명 중 1명꼴이다. 불법 체류자와 귀화자를 합치면 비율은 크게 높아질 것이라고 구 관계자는 설명했다.
방금 휴대전화를 들고 스쳐 간 여자는 중국말로 통화했다. 그 앞으로 걸어오는 남녀도 중국말로 떠들었다. 한국말을 섞어 썼다. 그들의 행색이 낯설어졌다. 유행과 먼 옷차림, 입체감 없이 하얗게 분칠한 여자의 얼굴, 남자의 짧은 머리칼과 단단하게 솟은 광대뼈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불콰한 남자들이 평일 아침의 거리를 배회했다. 편의점 간이 탁자는 맥주 막걸리 마른안주 종이컵으로 어지러웠다. 밟혀서 납작해진 담배꽁초들이 바닥에 뒹굴었다. 40, 50대로 보이는 얼굴들은 자주색을 띠었다. 그을린 살갗에 술기운이 오른 탓이었다. 무채색 상하의에 운동화나 등산화 차림은 여느 일용직 근로자의 모습이었다. 그들이 갖고 다니는 가방은 작업복과 세면도구로 부풀어 있었다.
제 몸집보다 큰 짐수레를 밀고 가던 조선족 여성은 임갑련(78)씨였다. 키 145㎝쯤에 왜소했고, 구릿빛 얼굴의 주름은 조각칼로 판 듯 깊었다. ‘유리제품 취급주의’라고 적힌 종이상자들과 빈 깡통이 수레에 수북했다. 임씨는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일본인이 쳐들어와서 부모랑 중국 둔화(敦化)로 이주했다”고 말했다. 아들 내외와 돌아온 건 2004년이다. 남편은 30대에 병사했다.
임씨는 폐지와 깡통을 고물상에 팔아 하루 1만원 정도 번다. 단칸방에서 혼자 살고 있다. “따로 사는 아들 내외는 노가다(공사판 막벌이)한다”고 했다. 임씨는 연신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한국에 살아서 참 좋다”면서.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왼다리를 절었다. 멀어진 뒷모습을 보고 알았다.
구인난
직업소개소는 대부분 지하였다. ‘어서오십시요’라고 맞춤법에 안 맞는 안내판을 따라 내려갔다. ‘한솔취업’ 실내는 82.6㎡(25평)쯤 됐다. 구인 조건을 적은 A4용지가 물고기 비늘처럼 벽면을 도배했다. 업종과 지역, 구인자의 성별·나이·비자, 급여, 숙식 제공 여부 등이 요약돼 있었다. 용접, 가정부, 간병, 전자제품 조립, 벽돌 제조, 타이어 분쇄, 비닐 세척 등이었다. 월급은 대개 150만원 안팎이었다.
소장 박영훈(60)씨는 “하루 30~40명이 찾아오는데 남자가 70%”라며 “비자 연장 자격을 얻으려고 제조업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방문취업(H-2) 비자로 들어온 사람이 제조업과 농축산업 분야에서 1년 이상 일하면 재외동포 체류자격(F-4)을 준다. 사실상 무기한 체류할 수 있는 비자다.
“처음엔 주는 대로 일했는데 오래 살다 보니 따지는 게 많아요. 잠자리랑 식사 좋아야지, 먼지 없어야지, 봉급 많아야지. 그래서 지방 같은 덴 안 가요.” 소개소는 한산했다. 뒤에서 “건설 교육 받았고, 용접도 잘하고, 비자는 H-2”라고 구직자 조건을 전화로 설명하는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인근 ‘동북아직업소개소’엔 20여명이 구직 상담을 받거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장 김명빈(59)씨의 책상엔 구직자 인적사항과 비자 종류, 희망 업종 등이 적힌 장부가 보였다. 그는 태블릿PC를 꺼내 보여줬다. 전국 각지의 업체들이 표로 정리돼 있었다. “사람이 없어서 못 보내주고 있어요. 지방에선 사람이 없어서 문 닫을 판이에요. 제조업만 비자를 주니까 식당 같은 덴 사람이 없어요.”
소개소는 한 공간에서 직업 중개인 10여명이 각자 일하는 식으로 운영된다. 소장(사장)이 월 15만~30만원씩 받고 책상을 내준다. 40, 50대 여성 예닐곱 명이 줄 선 책상은 가정부 일을 소개하는 창구였다. 담당자는 “젊은 여자는 회사를 많이 찾고 40대 이상이 가정부랑 식당 일을 많이 찾는다”며 “곧 추석이라 가정에선 사람을 안 찾고, 교포들도 명절을 쇠려고 일거리 찾는 발길이 줄었다”고 했다.
편견
직업소개소에서 만난 남자(60)는 최근 재입국한 조선족이었다. 두만강변인 중국 투먼(圖們)에서 왔다고 했다. “2008년 처음 왔을 때 여러 군데서 생활했어요. 경기도 포천부터 경남 진주까지 다녔어요. 별 거 다 했어요. 숯불, 펜션, 우렁이 농장.” 그는 중국에서 일하던 공장이 망해서 한국에 왔다.
“답답해서 왔는데 중국보다 힘들어요. 돈 버는 건 나아도 살림(생활)은 못해요. 같은 일 해도 대우는 제대로 못 받으니까. 한국사람 선입견 심해요. 중국에서 왔다고 하면 ‘빨갱이’라고. 그게 뭔지 알기나 아는지. 안 해도 될 일을 시키고, 숙소 키 안 줘서 사우나 가서 밤새웠는데 바로 작업시키고.”
조선족 사회에서 한국인의 인상이 나빠졌다고 그는 말했다. “스트레스 받고 돌아가니까요. 요즘 중국에서 한국 사람은 조심해야 해요. 쌍불 켜고 있어요.” 그의 아들(31)은 최근 한국 국적을 얻었다.
일어나려는데 조선족 여자가 “나 할 말 있어요”라며 붙잡았다. 꽃무늬 치마를 입은 그는 ‘1960년생 김가’라고만 밝혔다. “제가 가정부 4년 했어요. 집에 카메라가 있어서 옷 입고 목욕하고 밥 먹고 물 마실 때도 불편해요. 뭐 도둑질하는 것처럼. 우리가 일하러 왔지 나쁜 일 하러 온 거 아니잖아요.”
여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거실 주방 베란다는 물론 욕실과 방에도 카메라가 설치돼 있다고 했다. 엄지발톱을 검게 물들인 여자가 물었다. “인권침해 아닌가요? 심리 불안 생겨요. 저는 가정부도 회사일이라고 생각해요. 회사에서도 계속 감시는 안 하잖아요.” 그는 불법 체류자라고 했다.
김씨가 다시 말했다. “애는 유치원 한 번 보내는 데 서너 시간 걸려요. 이 핀도 싫다, 저 핀도 싫다, 신발도 수십 켤레인데 다 싫다. 부모가 변호사라고 인성교육 잘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식당이 더 좋아요.” 옆에서 듣던 또 다른 조선족 여성은 “난 그런 아(아이) 안 봐요”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우정
교회에서 묵는다는 조선족이 많았다. 대림동에선 금천교회가 4년 전부터 조선족을 들였다. 상가건물 지하 1층 예배당 옆에 20~30명 규모의 쉼터를 만들었다. 이선규(64) 목사는 “교포를 위로하는 건 말보다 행동”이라며 “처음엔 반대하는 교인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같이 돕고 있다”고 했다.
지영종(69) 박채옥(67·여)씨 부부는 2007년 가을 교회에 왔다. “일하러 갔다가 새카만 밤에”로 시작하는 박씨의 말을 지씨가 끊었다. “새카만 밤이 아이디요. 해가 넘어가고 하늘이 빠알갛게 돼 갈 때였디요. 동서남북 모르고 대림동에 들어섰는데 비가 올까 말까 했지. 길가에 선 사람한테 ‘여인숙이 어디요’ 물었는데 그가 얼빵하게 대답했지요. 그때 목사님이 따라와서 자기 집으로 데려갔지요.”
부부는 그해 옌볜(延邊)에서 왔다. 처음 입국한 2005년엔 전남 나주에서 일했다. 지씨는 시골 농장에서 오리를 키우고 박씨는 시내 식당에서 일했다. “나는 60만원, 아내는 40만원 받으면서 했어요. 그땐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주는 대로 받았어요. 그렇게 두 달 반 따로 살았지.” 박씨가 말을 받았다. “아, 그때 생활은 말도 말아요. 주인은 괜찮은데 같이 일하는 사람이 욕해요. 아침 7시 출근인데 나는 4시면 일어나서 일했어요. 그래도 일 못한다고 그래요. 손님 많이 들어오면 내가 행동이 굼떴죠.”
부부는 첫 입국 때 거저 나오는 3개월짜리 관광 비자를 받으면서 중국인 중개인에게 3만6000위안을 줬다. 당시 환율로 약 430만원이었다. 한국에선 비자를 연장해주겠다는 한국인 여성에게 120만원을 떼였다. 기다리다 때를 놓쳐 불법 체류자가 됐다.
“교회에선 돈도 안 받고 몇 번이고 그냥 있게 했지요. 밤 12시 넘어도 문 두드리면 목사님이 빤스 바람으로 나와서 우리한테 방 내줬지요. 그래서 우정의 싹이 트기 시작했지요.” 지씨는 못 받은 월급 70만원을 가리봉동 목사의 도움으로 받은 일, 한국인 수녀가 기차표를 끊어준 일 등을 나열했다.
부부는 한국서 번 돈으로 교회 쉼터보다 큰 집을 옌볜에 지었다고 했다. 일주일간 제주도 여행도 했다. 박씨는 말했다. “우리 쪼그만 할 땐 ‘남조선 나쁜 놈’이라고 했어요. 지금은 안 그래요. 우리가 한국 나왔기 때문에 저금도 있고 집도 지었어요. 이렇게 고생하면서도 구경 다해서 원이 없어요.”
고향
지난 1일 오후 7시쯤 대림역 12번 출구에서 대림2동 중앙시장으로 이어지는 거리는 중국말로 웅성거렸다. 중국어 간판이 빽빽했다. 중국 식당과 상점이 가장 밀집한 골목이라고 상인들은 말했다. 한국말을 못하는 종업원이 많았다. 대림동 조선족 절반이 사는 동네였다. 중국 식품점 ‘만리장성’을 10년째 운영 중인 한국인 최성안(49)씨는 “세입자 10명 중 9명 이상이 조선족”이라고 했다.
시장에서 중국식 반찬가게를 하는 이청남(48)씨는 2008년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 그는 중국 옌지(延吉) 출신이다. 아버지(75)가 네 살 때 만주로 갔다. 일본이 만주국 수립 후 조선의 영세 농민을 강제 이주시킬 때였다. “아버지 부탁으로 고향 찾으려고 한국을 몇 번 오갔어요. 충남 부여에서 족보가 나오더라고요.” 이씨는 경기도 안산에서 채소가게를 하다 3개월 전 대림동으로 옮겼다. “돈 버는 것도 있지만 고향 사람한테 한국 음식이 잘 안 맞잖아요. 여긴 다 고향에서 먹던 반찬이에요.”
조선족 남성들 사이에 잠시 고성이 오간 건 5일 오전 11시50분쯤이었다. 대림역 8번 출구 맞은편 피자가게 그늘에 20여명이 앉아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동포신문 ‘看中國’(간중국)을 펼치자 성말라 보이는 남자가 뒤에서 눈을 부라리며 삿대질했다. “어이, 어디서 공산당 욕하는 신문 보는 거요?”
주변에서 거들었다. 욕설도 쏟아졌다. 신문을 쥔 남자는 쩔쩔맸다. 한 남자가 신문을 낚아채 사납게 찢었다. 내팽개쳐진 신문 1면에는 리비아 반군이 수도에 진입했다는 기사가 톱으로 실려 있었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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