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회고록] 경기 용인 마평동 김영자 할머니
“교회 다닌다고 핍박했던 시댁서 목회자 3명 나왔지”
경기도 용인시 마평동에 사는 김영자(70·용인제일교회 권사) 할머니는 10년 동안 일기를 썼다. 총 11권의 일기장을 갖고 있다. 1978년 기도 중에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내가 너를 높이리라. 내가 너를 통해 큰 영광을 받으리라”는 음성을 듣고 난 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20년 넘게 불교를 믿은 친정에서는 남동생이 주의 종이 되면서 믿음의 가정이 됐다. 시댁은 교회를 열심히 나가다 사회생활에 젖어 신앙을 멀리하면서 핍박이 심했다. 그러나 크리스천의 봉사 모습에 감동받은 시어른들이 믿음에 눈을 뜨면서 3명의 목회자까지 배출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한 김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의 단을 거둔다’는 말씀을 품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고 있다.
절에 나가다
경북 의성군 금성면, 아주 작은 시골에서 태어났어요. 안동 김씨이고 종가집이에요. 오빠, 저, 독일에서 목사 하는 남동생, 그 밑으로 여동생, 이렇게 4남매 중 둘째예요. 오빠는 저를 연단하신 분이에요.
오빠가 6·25때 피란 갔다가 학도병으로 붙들려 갔어요. 열여덟 살인데. 어머니가 아들이 못 찾아올까봐 피란 갔다 다시 시골로 들어오자고 하셨어요. 부모님은 자식한테 애착이 대단하셨어요. 어머니는 항상 밥을 지어 부뚜막에 한 그릇씩 오빠 몫을 떠놓고 기다렸어요.
6·25때 우리 동네에서 한 집이 교회 나갔어요, 전쟁이 끝나기 전이었는데 친구 엄마가 교회를 가자고 해서 뭔지도 모르고 두 주간을 갔어요, 거리가 7마장(2772m) 됐어요. 근데 외할머니가 오시더니 “아들 보내놓고 교회가면 안 된다. 절에 가서 불공 드려야 된다” 그래서 그때부터 절로 옮겨 20년 넘게 다닌 거예요. 하나님이 이미 예정해 놨는데 그렇게 해서 절로 간 거예요. 어머니는 지극정성으로 열심히 다니시고 주방에 정화수를 떠놓고 자식들을 위해 빌었어요. 우리 이름 부르면서 “눈에는 정기 주고, 귀에는 총기 주고, 손에는 재주 주고”라고 비셨어요.
오빠가 무릎에 관통상을 입고 돌아왔어요. 병원에서 병리를 배워 제대했어요. 점촌 병원으로 취직했어요. 오빠랑은 아홉 살 차이 나요. 나는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는 남동생을 위해 포기했어요. 안동사범학교를 나오면 선생을 할 수 있었는데. 아버지가 열네 살에 돌아가셨는데 아버지만 살아계셨으면 갔지요. 그래서 스무 살 때 점촌에 가서 미용기술을 배웠어요.
결혼과 함께 시작된 연단
미용을 배우고 스물세 살에 강원도 영월군 상동으로 취직해서 갔어요. 오빠 아는 사람이 하는 미용실이에요. 대한중석회사가 있어 손님이 많았어요. 스물다섯에 오빠가 의정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취직하면서 의정부 중심가에 미용실을 개업했어요. 거기서 일류 미용사가 됐어요. 근데 결혼할 생각은 없었어요.
스물일곱에 서울 미아동으로 옮겼어요. 선이 계속 들어왔어요. 아는 사람이 여섯 살 많은 박기호씨를 소개했어요. 2남4녀의 장남이고 재산은 없지만 어머님이 아주 좋은 분이래요. 만났는데 첫인상이 별로였어요. 근데 자꾸 눈앞에 어른거려 두 번째 만났는데 프러포즈를 받았어요. 이날 그냥 헤어졌으면 결혼 안 할 걸 아시고 하나님이 딱 붙여놓으셨어요. 여름에 만나 그해 10월에 결혼했어요. 다음해 큰아들을 낳았어요. 남편은 창동에서 제지회사에 다녔어요. 거기서 5년 있다 나는 아이들 데리고 용인으로 왔어요. 남편은 친구들 때문에 군포로 출퇴근을 하고 용인으로 온다고 했어요. 우리 남편은 친구 없으면 못살아요. 근데 시동생이 “형은 용인으로 오면 절대 안 된다. 군포로 가라” 했어요. 죽어도 안 된다고 해서 1년만 살기로 하고 여기로 왔는데 지금까지 살고 있는 거예요. 시어머니 집에 내려와서 한집에 다 살았어요. 힘들었어요. 하나님이 연단하신 거예요. 용인에 와서 역사가 시작됐어요.
친정 구원
남동생은 학교를 늦게 들어갔는데도 공부를 잘 했어요. 대학 가서는 조계사 다니고. 조계사에서 불교철학을 연구하라고까지 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성격이 한다 하면 올인해서 중이 됐을지도 몰라요. 서울 법대를 가려고 했는데 실패했어요. 이때 독일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했어요. 아마 독일 가려고 예비시키셨나 봐요. 경희대 법대 갔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휴학하고 하사관으로 군에 갔어요. 백령도에 배치받았어요. 거기 군목이 “세상사람 다 안 믿어도 너는 예수 믿어야 된다”고 해서 교회에 나갔대요. “도대체 예수가 누군데 그렇게 말을 하냐” 해서 교회에 나갔다가 은혜를 받았어요. 주의 종이 되기로 결심했대요.
오산으로 배치받아서 어머니가 밥을 해주러 갔어요. 그때 동생이랑 어머니랑 싸웠대요. 동생이 새벽기도 나가서 우리 엄마 교회 나오게 해 달라고 기도했대요. 어머니는 정화수 떠놓고 새벽마다 우리 아들 교회 나가지 않게 해 달라고 빌고요. 그렇게 1년을 싸웠어요. 근데 언제부턴가 새벽만 되면 뭐가 우리 어머니 목을 졸라서 못 빌었대요. 너무 답답하니까. 동생이 하나님이 역사하나 보다 하고 기도해드린다고 하니 어머니가 거부했대요. 그러다 죽겠으니까 항복을 하신 거예요. 그래서 그날부터 예수 믿고. 동생은 전역해서 순복음신학을 했어요. 경기도 파주시 지천리로 개척하러 갔어요. 지천리교회. 어머니를 모시고 갔어요. 오빠랑은 완전 등을 돌렸어요. 20년 넘게 절에 다니다 교회를 가니까. 여동생도 남동생 따라 가서 예수 믿고 봉사하고.
남동생은 지천에서 개척하고 교회 건축하고 어머니와 여동생은 다니고. 오빠는 싫다고 원수가 됐어요. 나는 그때 안 다녔어요. 남동생은 지금 독일에서 목회해요. 30년 넘었어요. 선교사로 정식 파송받고 독일 가서 간호사와 결혼하고 공부했어요.
믿음의 눈을 뜨다
1975년 내가 교회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어요. 초등학교 때 2주 나갔는데 그때 배운 찬송이 안 잊혀져요. 점촌에 있을 때 급성 맹장 수술을 했어요. 수술을 하고 드러누워 있는데 새벽송을 하더라고요. 그때 천사가 온 것처럼 감동이 오더라고요. 나는 몰랐지만 이미 하나님이 성령으로 감동을 시키신 거예요.
남편하고 시누들은 감리교회 개척 멤버들이에요. 남편은 고등학교 다닐 때 새벽종도 치러 다니고 건축할 때 건축 참례도 하고 그랬대요. 그러다가 다 타락한 거예요. 시할머니도 교회가 없어서 안식교회 다녔대요. 학교 다니고 세상에 나와 다 타락해서 교회를 안 나가게 됐어요. 반사도 했는데. 어릴 때 믿음은 다 믿을 수 없는 거예요. 타락하니까 연단이 많은 거예요. 어머니하고 남동생이 기도 많이 해서 때가 되니까 둘째 시누가 동서하고 나를 감리교회에 갖다 앉혀놨어요. 그러다 시누는 안 다니고 절에 갔어요. 그때만 해도 용인제일교회는 공설운동장에 천막교회를 시작했어요. 감리교회는 산에 위치가 좋아요. 그때는 성경을 가져가는데 가방이 없어서 신문에 둘둘 말고 다녔어요. 남들이 볼까봐 창피해서. 동서도 안 나오고 혼자 1년을 다녔어요.
그때까지 하나님이 누군지 예수님이 누군지 전혀 몰랐어요. 그러다가 1년이 되니까 세례를 받으래요. 세례를 받고 발을 끊었어요. 가기 싫어서 안 나갔어요. 연단이 시작된 거죠. 그때 다녔어야 되는데 거길 안 보내고 여길 보내려고 하나님이 섭리하신 거예요.
창동 살 때 월급 탄 거 제하면 하나도 안 남아 자꾸 빚을 졌어요. 그러다 교회를 그만두고 오빠와 손을 잡았어요. 남편이 월급 타면 친구들하고 쓸 거 쓰고 던져줘서 도저히 생활이 안 됐기 때문이에요. 오빠가 사업을 한다고 같이 하자고 해서 남편한테 허락받았어요. 100만원을 투자했어요. 계속 안 되는 거예요. 자꾸 넣고 넣고 해서 700만원까지 물렸어요. 그때 용인 집 한 채 값이에요. 남편은 자기가 허락했지만 친정 식구랑 그렇게 되니 나를 날마다 괴롭혔어요. 어려움을 당하다가 김정주 집사라고 아들 친구네가 78년도에 이사왔어요. 생명의 은인이 온 거예요. 동생이 교회 개척했는데 도와주지도 못해 마음이 아픈데 “누님 이번에 가면 꼭 교회 나가세요” 해서 오자마자 두 아들을 용인제일교회 주일학교로 내보냈어요. 김 집사가 “아줌마 교회 가 교회 가” 하는데 “내가 왜 감리교회 가지. 다른 교회 가냐”고 안 갔어요. 근데 부흥회를 한다고 해서 용인제일교회에 구경 갔어요. 그래서 이 교회에 왔어요. 부흥회 가서 첫 시간 설교를 듣는데 무슨 말씀인지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순간에 그분이 계시다는 게 믿어지고 성경이 100% 믿어져요. 믿음의 은사를 받았어요. 월요일부터 토요일 새벽까지 부흥회에 계속 갔는데 성령이 오는지 진동이 오더라고요. 성경이 믿어져서 그때부터는 싸지 않고 보이게 들고 다녔어요. 그날부터 새벽기도 철야기도 다 하고 성가대도 하고 저녁마다 와서 울었어요. 판검사 되기 원했던 동생이 목사됐을 때 미워한 거 회개했어요. 설교 듣고 믿음의 눈이 떠지면서 회개하고 1년 후 집사 임명받았어요.
남편 구원
78년에 은혜 받고 부채 때문에 하나님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기도만 했어요. 기도원에 가려는데 목사님이 “기도원에 가면 조심해야 되는데 사탄의 음성은 귀에서 속삭이고 하나님의 음성은 가슴에서 들린다”고 가르쳐주셨어요. 한얼산기도원으로 갔어요. 그때 남편은 친정 오빠 빚 때문에 난리지 시댁 식구들은 담보 잡혔다고 뭐라 그러지. 그래서 죽을힘을 다해 기도했어요. 근데 기도하는데 어느 순간 하늘문이 열리면서 하나님 음성이 쏟아져 왔어요. “내가 니 마음을 안다. 네 가정은 이미 구원을 받았느니라. 너는 이제 내 종이 되었느니라”는 음성이 들리는 거예요. 응답받고 내려왔어요. 5년 동안 계속 가정은 어렵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도 먹어도 가슴이 텅 비었어요. 부흥회 새벽기도 철야기도 다 쫓아다녔어요. 5년이 되니까 가슴이 찼어요. 갈급해서 미쳐 돌아다니는 거는 없어지더라고요.
또 기도원에 갔는데 “왜 남편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느냐”고 호통치셨어요. 그동안 전도는 했었어도 남편을 구원하려고는 하지 않았어요.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내가 너를 높이리라. 내가 너를 통해 큰 영광을 받으리라”고 축복해주셨어요. 이 말씀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처음에 은혜받고.
도대체 왜 하나님은 열심히 기도하는 나에게는 호통치고 술만 먹고 돌아다니는 남편은 사랑하느냐. 그것이 고민이 됐어요.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과 밥을 먹으려고 식기도를 하려는데 세미한 음성이 또 들렸어요. “너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알지 못하느냐.” 남편이 잃어버린 양이잖아요. 예수 믿다 타락했으니까. “맞다 잃어버린 양이다”라고 깨달았어요. 그날 이후로 남편을 위해 한 끼씩 금식하며 특별기도 했어요. 7년을 했어요.
남편이 세 번을 아파서 쓰러졌어요. 직장생활 하면서 교회 나오기 전에 각혈을 하는데도 병원 갈 돈이 없었어요. 큰시누 남편을 불러서 병원에 입원시켰어요. 근데 저한테 기쁨이 넘쳤어요. 예수 믿으라고 아픈 거였어요. 퇴원했는데도 안 나간대요. 그래서 하나님 나를 데려가라고 드러누웠어요. 주일날 교회를 빠졌더니 시어머니가 놀라서 시동생을 불렀어요. “에미가 교회도 안 나가고 밥도 굶고 저렇게 드러누웠는데 너 어떡할 거냐” 하니까 그날 저녁에 남편이 교회에 나갔어요. 85년에 남편이 예수 믿기 시작했어요. 식구들이 다 나갔어요. 철야기도도 같이 나갔어요. 열심히 기도했어요. 10년 믿다가 천국 보냈어요. 가는 날 “당신 예수 믿지” 하고 의심하니 “믿는다”고 고백하고 구원받고 갔어요.
시댁 구원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이 해결해주셔서 굶지는 않고 살았어요.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조의금으로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었어요. 그동안 아이들이 교회 다니고 시어머니가 다니고 남편이 다니고. 나는 주일날 집안 행사는 참석 안 하니까 집안 어른들이 나더러 미쳤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시어머니상 당하고 교회에서 음식 다 해주고 성도들이 도와주니까 집안 어른들이 감동을 받았어요. 시작은 아버지가 “야 하나님의 역사는 대단하다. 나도 교회 다닐란다” 그러셨어요. 나중에 목사되셨어요.
처음에는 교회 나가면서도 종손이라 제사를 다 지냈는데 목사님 설교 듣고 마음이 불편했어요. 그러던 중 하나님이 허리를 다치게 해서 제사를 안 한다고 선포했어요. 그 후 구원이 시작됐어요. 시어머니 시누 시누남편 시누아이들 다 은혜받았어요. 큰시누 남편은 교회 나간다고 저한테 미쳤다고 미워하고 핍박했는데 지금은 목사됐어요. 우리 큰아들도 목사됐어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이제는 매일 감사기도해요. 요즘은 음성 대신 말씀으로, 기도로, 꿈으로 보이셔서 명령하세요. 성경대로 응답을 받았어요. ‘하나님 뭘 해야 합니까’ 기도하다 북한 선교를 하라고 보여주셨어요. 또 중국어부에서 입양선교를 하고 있어요. 중국 사람을 데려와 입양해서 신학을 시켜서 중국으로 파송하는 거예요. 한족 한 명을 선교사로 키우고 있어요. 87년에 심방 전도사로 임명받았어요. 허물도 많은 저를 사용해주신 변우상 목사님께 감사해요. 또 총여전도회장이라서 하는 게 많아요. 회장일을 하다보니 주방에 일이 많아서 주방에서도 봉사해요. 교회가 봄·가을로 총력전도를 하는데 봄에 100여명이 5주간 500명을 전도했어요. 하나님의 기적을 많이 봤어요.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영광 돌려요.
■ 연보
1942년 경북 의성군 금성면에서 2남2녀의 둘째로 출생
1950년 절에 다니다
1962년 경북 문경시 점촌동으로 이사
1965년 강원 영월군 상동으로 취직
1967년 경기 의정부시로 이직
1969년 서울 미아동으로 이직
1969년 2남4녀의 장남인 박기호씨(당시 33세)와 결혼
1970년 큰아들 출생
1972년 둘째아들 출생
1974년 경기 용인시로 이사
1975년 용인 감리교회 출석
1978년 용인제일교회 출석
1995년 남편 별세
■ 용인제일교회
1973년 4월 이기만 군목이 담임목사로 경기도 용인군 용인면 김량장리254 이화예식장에서 장로교회를 설립했다. 73년 7월 용인면 마평리858 용인공설운동장 스탠드에 천막(49.5㎡)을 치고 이전했다. 74년 변우상 목사가 취임 후 현재까지 시무하고 있으며 내년 은퇴할 예정이다. 80년 현재 자리에 지하 1층, 지상 3층, 연면적 2283㎡로 교회를 신축했다.
이 교회 힘만으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탄자니아와 케냐에 우물, 학교, 교회 등을 신축해주는 등 아프리카 선교에 힘쓰고 있다. 말씀 중심으로, 평신도가 함께하고, 선교·전도에 온 힘을 다하며, 다음 세대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고,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교회로의 비전을 이뤄가고 있다. 경기도 용인시 마평동655-1(031-321-6001∼4).
용인=글 최영경 기자·사진 윤여홍 선임기자 ykchoi@kmib.co.kr
◇이번 호를 끝으로 구술회고록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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