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강국, 우리가 산 증인인데…” 한진중공업, 고공 크레인 농성 198일

Է:2011-07-21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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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번 부산 버스가 신호등 앞에서 멈춰 섰다. 승객들은 우비를 입고 보도블록에 일렬로 앉아 시위하는 사람들을 차창 밖으로 무심히 쳐다봤다. “우리는 함께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한진중공업 정리 해고자와 이들을 지지하는 사람들 100여명이 외쳤다. 1분쯤 지났을까, 신호가 바뀌자 버스는 달렸다. 승객들은 고개를 돌렸다.

“보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해고자들은 8차선 도로 맞은편 35m 크레인을 향해 소리쳤다. 함성이 들리자 85호 크레인에선 불빛이 깜빡였다. 정리해고 철회를 촉구하며 고공 농성 중인 김진숙(51·여)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의 불빛 신호였다. 집회가 끝나자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한진중공업 사옥 맞은편 부산 청학동 신도브래뉴 고층아파트 상가 간판 밑으로 삼삼오오 해고자들이 모여 비를 피했다. 50대 남성이 우뚝 솟은 85호 크레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남자에게 다가갔다. 지난 19일 오후 8시, 하늘은 어둡고 비는 내렸다.

크레인 85호

이 남자는 한진중공업 생산지원팀에서 일하는 한상철(50)씨다. 지난 2월 노동자 170명이 정리해고됐지만 한씨는 해고자 명단에 없었다. 그래도 매일 오후 6시, 85호 크레인이 제일 잘 보이는 신도브래뉴 아파트를 향한다.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밤마다 아파트 상가 주위에서 노숙을 한다.

85호 크레인은 잔인한 추억이다. 한씨는 입사 동기이자 특수선 부서에서 함께 일했던 고 김주익 노조위원장을 85호 크레인에서 잃었다. 김 위원장은 정리해고 철회를 촉구하며 85호 크레인에서 129일간 고공 농성을 벌이다 2003년 10월 17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씨는 김 위원장이 자살할 때 크레인 아래에 있었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사고였다. 그해 또 다른 노동자가 조선소 내 도크에서 자살했다. 회사는 정리해고를 철회했다.

“그 후로 월급이 오르고, 해고가 철회됐지만 기쁘지 않았어요. 사람 죽여 놓고 받는 돈 같아서. 시간을 거스를 수만 있다면 그 친구, 살려놓고 싶어요. 이번에도 김진숙 지도위원이 올라가는 걸 미리 알았으면 못 올라가게 보초라도 섰을 겁니다. 김 지도위원이 그럽디다. 20여년 전 노조활동하다 해고됐는데 죽기 전까지 단 하루라도 복직이 돼 일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자기처럼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안 살게 하려고 올라간 것 같아요. 자기가 가진 게 열 개면 열 개 다 주는 사람이에요. 이빨도 안 좋은데 치료도 안 받고 비정규직 기금 2000만원, 기륭전자에 400만원을 내놨었어요. 자기도 가난하면서.”

바람이 불자 85호 크레인에 붙은 플래카드가 나부낀다. ‘거짓 선동 김진숙은 내려오라’ 그렇게 적혀 있었다.

이번 사태로 한씨는 또다시 친구를 잃었다. 그는 파업을 끝까지 함께하지 않은 동료들과 말을 섞지 않는다. “아마도 돈 때문이었겠죠. (그 친구들도) 2003년 농성 때는 함께 투쟁했는데….”

해직은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놓았다. 용접공 오모(36)씨는 해고된 뒤 이혼했고, 선박 블록을 맞추는 일을 하던 고모씨는 대인기피증에 걸려 농성장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해고자

또 다른 남자가 지난 19일 우산을 들고 85호 크레인 맞은편에 서 있었다. 키가 165㎝쯤 되는 이 남자는 한진중공업 조선소 해고자 김태훈(53)씨였다. 1980년 입사한 그는 선박에 가스를 설치하는 일을 했다. 이 남자의 왼손 세 손가락 끝은 절단돼 있다. 파이프 사이에 손가락이 낀 흔적이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 크게 말해야 알아듣는다. 조선소 소음 때문에 생긴 증세다. 비해고자 한상철씨도 한 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가끔 김진숙 지도위원이 크레인 위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여요. 제가 보면 스스로 우울증 안 걸릴라꼬 하는 거 같아요. 고립감이 얼마나 크겠어요. 우울증, 그게 무섭잖아요.”

김씨의 아내는 올해 겨울 자살을 시도했다. 원래 우울증 초기 증세였던 아내는 평소 200만원씩 들어오던 월급이 끊어지자 불안해했다. 부부 사이에 말다툼이 잦아졌다. 어느 날 새벽, 잠이 깨서 거실에 나갔는데 아내는 목에 허리띠를 매고 있었다. 그날부터 아내는 2주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남 일 얘기하듯 담담하게 말했다. 해고되고 이혼한 사람보다 자기 상황이 그나마 낫다며.

“내가 울산 조선소에서 대의원 두 번 하긴 했는데 정치도 잘 모리(르)고 말도 잘 못해요. 아까 말했잖아요, 열네 살부터 공장 다녔다고. 내가 아빠라고 하지만 많이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늙은 곰, 대학생인 자슥(식)은 새끼 호랑이라 생각하거든요. 근데 이번 일 때문에 사람 공부, 많이 한 것 같아요. 진짜 내 상식으로는 이해 안 되는 사람도 만났고요.”

그가 처음 충격을 받은 건 ‘들풀 한의원’ 의사 때문이었다. 지난 2월 해고된 뒤 그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농성을 하고 있었다. 농성장에 한의사가 수차례 찾아와 무료 진료를 했다. 저 사람은 돈도 안 주는데 왜 우리를 도와주지? 궁금해서 질문했단다.

“그분이 그러데요. 자기 노동 강도가 100이믄 170이 들어온대요. 그래서 100은 지(자기) 꺼고, 70은 돌려주는 게 맞대요. 처음엔 이해 안 되데요. 사람 공부할라믄 이해심이 필요한 것 같아요. 예전에 조선소서 일할 때요, 땡크(탱크)에서 두 시간 일하면 온몸이 땀에 젖거든요. 웃통을 벗는데 그걸 본 임원이 왜 작업복을 벗냐면서 옷을 입어야 한다는 거예요. ‘욕 보재?’(힘들지?) 한마디면 더 열심히 할 낀데 말입니더.”

얘기를 마친 그는 좁고 어두운 골목길로 들어갔다. 골목 깊숙이 해직자들의 숙소인 ‘연우식당’만 불을 밝히고 있었다. 골목길에서 큰 대야를 놓고 설거지를 하던 해고자 최용준(36)씨가 일어나 김씨의 한쪽 어깨를 감싸 안았다. “행(형)님이 조선 강국, 75년 한진중공업 산 증인 아입니꺼.” 이 말을 들은 김씨가 힘없이 웃었다. 이들이 입은 옷은 한진중공업 파란색 작업복이었다. 식당 구석에선 다음날 먹을 국이 끓고 있었다.

도경정(33)씨는 지난 2월 14일까지 배관공의 아내였다. 지금은 해고자의 아내다. 해고되자 곧 경남 김해시 내동 사원아파트에 ‘퇴거 이행 독촉장’이 날아왔다. 지난 18일 만난 도씨는 신축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구경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아파트를 사거나 전세를 얻을 수 없는 도씨는 씁쓸하게 웃으며 모델하우스를 나섰다. “사람들은 저마다 꿈이 있잖아요. 10년 열심히 돈 모아서 부산에 가서 집 사는 게 꿈이었는데, 꿈이 사라졌어요.”

가족대책위원회 대표인 도씨는 요즘 비해고자들의 교육장을 찾아가서 유인물을 배포하거나 저녁 집회에 참석한다. 지난 14일 아기를 업고 부산 감만동 교육장 앞에 갔는데 한 노동자가 그에게 1만원을 손에 쥐어줬다고 한다. “눈물이 나서요. 아기 맛있는 거 사 주세요.” 이 노동자는 도씨를 못 쳐다보겠다며 교육장 안으로 급히 들어가 버렸다.

얼마 전에는 85호 크레인 맞은편 고층 아파트 주민들을 찾아갔다. 투쟁이 장기화되자 소음 때문에 주민들은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주민 최모(29·여)씨는 “희망버스가 오는 날 오후 6시부터 도로가 차단돼 남편이 영도다리에서 걸어서 집에 왔다. 아이들도 시위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 잠이 깬다. 사태가 빨리 해결돼 동네가 조용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도씨는 무릎을 꿇고 사정했다. “주민 분들께서는 갈 곳이 있지만 저는 갈 곳이 없습니다. 해고돼서 사원아파트에서 나가야 해요. 도와주세요.” 한 주민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김진숙이 해결하겠다고 말했으면 해결을 해야지. 저 크레인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신도브래뉴 주민들은 아파트 앞에서 집회를 하지 못하도록 영도구청에 진정서를 넣을 예정이다. 이 말을 전하는 도씨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도씨는 정리해고 명단이 발표되기 전에 남편과 밤에 나란히 누워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정리해고가 되지 않으면 해고자들과 함께 농성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도씨 부부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돌 지난 성민이가 나중에 커서 노동자가 될 수도 있는데 그때 부당 해고를 당해도 호소할 데가 없다면 부모로서 너무 억울할 것이다.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자.’

가족대책위원회에는 비해고자의 아내들도 활동하고 있다. “대책위에 후원금 보내시는 분들도 계신데 그 돈을 못 쓰겠어요. 배고플 때도 대책위 언니들이랑 바깥에서 잘 안 사먹고 집에 와서 밥 먹고. 우리끼리 이런 이야기해요. 억울해도 말할 곳이 없는 게 진짜 억울한 거다, 그에 비해 우리는 축복 받은 거니까 이번 사태가 해결되면 이 돈으로 소외된 노동 현장에 가서 돕자고요.”

김진숙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85호 크레인 밑을 지키는 여자는 황이라(32)씨다. 그는 하루 세 차례 물과 식사를 올려 보낸다. 식사를 받은 김 지도위원은 가끔 황씨에게 쪽지를 내려 보낸다. ‘혹시 강제 진압이 되더라도 폐쇄된 조선소 내에 있는 한두 사람이 물리적으로 대항하기엔 버겁다, 가만히 있는다고 비겁한 것은 아니니 너무 애쓰지 말아라.’ 이것이 가장 최근에 받은 쪽지다.

황씨가 식사를 상공에 올리고 사무실로 돌아가기까지 김진숙은 황씨를 향해 계속 손을 흔든다. 황씨는 세 번, 네 번씩 뒤돌아보다 사무실에 들어간다.

지하철 매표소 비정규직이었던 황씨와 김 지도위원은 2009년부터 함께 살았다. 황씨의 가족은 서울로 이사 갔고, 그때부터 황씨는 김 지도위원의 동거자였다. “주말에는 늘 같이 목욕탕에 갔고 산책을 했어요. 그런 평범한 일상이 그립고 집에 함께 돌아가고 싶어요.”

김 지도위원은 22일로 198일째 고공 농성 중이다. 황씨는 그가 크레인에 올라가기 전날까지 눈치 채지 못했다. 지난 1월 6일 새벽 5시30분쯤 황씨가 일어나니 김 지도위원은 편지만 남겨둔 채 사라진 뒤였다. 크레인에 올라가야만 하는 이유와 걱정하지 말고 보일러 켜고 잘 지내란 내용이 적혀 있었다. 황씨는 급하게 택시를 타고 한진중공업으로 향했다. 머리는 백지장이었고, 손이 벌벌 떨렸다. 85호 크레인은 노동자들에게 ‘죽음의 크레인’이다.

“그 무렵에 지도위원님 행동이 이상했어요. 뭔가를 자꾸 정리하는 것 같았고, 저한테 자꾸 맛있는 거 사주려고 하시고. 김주익 노조위원장님 돌아가시고 지도위원님이 한 번도 보일러를 안 켜고 찬 데서 주무셨어요. 저는 전기장판에서 잤고요. 그런데 크레인에 올라가기 전날, 저한테 보일러를 켜자는 거예요. 한 번도 안 켠 집이라서 구들장에서 가스 터지는 소리가 펑펑 터졌어요. 그 소리 때문에 밤에 잠을 설쳤는데….”

81년 돈을 많이 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의 유일한 처녀 용접공이 된 김 지도위원은 86년 관리자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노조 대의원에 당선됐다. 그해 7월 상사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해고됐다.

김 지도위원이 해고된 지 25년이 지났지만 이곳은 지금도 분규가 진행 중이다. 매일 아침 7시, 회사와 해고자들이 각각 틀어놓은 큰 음악 소리가 충돌해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정문 앞에서 해고자들은 농성을 하고, 용역직원은 입구를 봉쇄하고, 경찰은 불법 집회라며 해산을 통보한다. 출근 시민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8차선 횡단보도를 건넌다.

한 신문사의 오토바이 배달원이 해고자들에게 소리쳤다. “회사가 살아야 노동자도 살지. 잘렸으면 그만이지 끝까지 와 그라는데? 지난번 노사협의 했잖아.” 19일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지난달 27일 채길용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지회장은 노사협의 이행합의서에 서명했다. 노조가 170명의 정리해고를 수용하고, 190일간 진행된 총파업을 철회한다는 내용이었다. 노사협의를 앞두고 대의원대회나 노조 총회는 열리지 않았다. ‘노사협의 극적 타결’ 내용을 담은 보도자료가 배포됐다. 해고자들은 반발했다.

한진중공업 정철상 기업문화팀장은 “(총회나 대의원대회) 그런 건 필요 없다. 지회장하고 합의하면 되는 사항이다. 노조원들이 뽑아준 지회장이다”고 했다. 채 지회장에게 수차례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부산·김해=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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