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도 그곳에선 쉬어간다… 유홍준 前문화재청장이 지은 집 ‘휴휴당’

Է:2011-06-09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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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도 그곳에선 쉬어간다… 유홍준 前문화재청장이 지은 집 ‘휴휴당’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2006년 충남 부여군 외산면 반교(盤橋)마을에 집을 하나 지었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대구에서 오래 교수생활을 해서 시골살이가 숙원이었다고 한다. 일주일에 닷새는 도시에서, 이틀은 이 집에서 살고 있다. 거의 1년이 걸려 완성된 집에 그는 ‘휴휴당(休休堂)’이란 이름을 지어줬다. ‘쉬고 또 쉬는 집.’

지난달 출간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6권 333쪽에 휴휴당에 관한 대목이 있다. ‘방 하나, 부엌 하나 있는 8평짜리 세 칸 기와집과 헛간과 뒷간을 붙인 4평짜리 플라스틱 기와집, 두 채다. 집에 대해서는 나의 고집이 있다. 집은 절대로 크면 안 되고… 한옥은 무조건 세 칸 집이 예쁘고, 툇마루가 놓여야 멋도 운치도 기능도 살아난다.’

그는 책에서 휴휴당 얘기를 무척 아꼈다. 한 페이지를 넘지 않는 분량에 정작 집에 관한 설명은 몇 줄 되지 않는다. 문화유산을 찾아 평생 발품 팔아온 그가, 오랜 숙원 풀려고 1년간 매달려 지은 집을 ‘한옥은 무조건 세 칸이 예쁘다’는 설명으로 이해하라는 건 좀 아니다. 분명 이 집에는 인문학자가 감춰놓은 다른 비밀이 있을 것이다.

지난 7일 화요일, 휴휴당에는 주인이 없었다. ‘5도(都) 2촌(村)’ 사이클에서 ‘5도’에 해당하는 날인 듯하다. 마당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도시로 떠난 주인을 대신해서 대나무 장대 두 개가 가로로 걸쳐 있었다. 옛날 제주도에서 대문을 이렇게 했다. 양쪽에 돌기둥을 세워놓고 각각 구멍을 여러 개 뚫는다. 구멍과 구멍을 가로질러 장대가 하나도 없으면 ‘집에 사람이 있다’, 한 개가 걸쳐 있으면 ‘지금 사람이 없는데 곧 돌아온다’, 두 개면 ‘조금 멀리 출타했다’는 뜻이 된다. 유홍준 전 청장은 ‘조금 먼’ 서울에 간 것이다. 2∼3일 안에 돌아올 생각으로.

책에 나온 대로 휴휴당 본채는 방 한 칸과 부엌 한 칸, 작은 툇마루가 전부였다. 한옥기와 맞배지붕 아래에 걸린 편액에는 ‘休休堂’ 이름 옆에 작은 글씨로 ‘외산별서 집갑인자(外山別墅 集甲寅字)’라고 적혀 있었다. 외산별서는 ‘외산면 외딴 골짜기에 세운 농막’이란 뜻. 집갑인자는 休休堂 글씨체를 조선 세종 16년에 제작된 동활자 ‘갑인자’의 서체에서 가져왔다는 설명이다.

이 본채와 별채(뒷간과 헛간으로 쓰이는 작은 기와집), 시냇물 소리가 들리는 정자와 석등이 휴휴당의 전부다. 별채 헛간에는 손때 묻은 낫이며 호미가 그득하고 예초기까지 있다. 마당을 포함한 대지는 774㎡(234평)인데 본채와 별채를 합쳐도 건물은 39㎡(12평)를 넘지 않는다. 용적률 5%. 여백은 온갖 식물이 적당히 채우고 있다.

나무와 꽃의 이름을 구별하는 건 휴휴당의 편액을 읽는 것보다 어려웠다. 둥글둥글한 돌로 낮은 담장을 세운 이웃집 텃밭에서 한 아주머니가 양파를 캐고 있었다. 도움을 받아야 한다.

-휴휴당과 이웃이신데요. 여기 주인 어떤가요?

“왜유. 안 할 소리 하믄 잡아 갈라고 하나. 왜 그런데유.”

-그냥요. 이웃이시니까….

“여긴 이냥 관리하는 사람이 없기 때미. 풀 많고 허니께, 품 필요할 때 내가 일 해드리믄 품삯도 주시고 하쥬. 일당유? 농촌은 4만∼5만원이유. 더 주셔두 못 받아유. 그 집만 값 올린다고 욕먹으니께유.”

이렇게 말하고 나서 김춘순(62) 아주머니는 이내 경계심이 풀어졌다. 앞장서서 휴휴당 마당의 나무와 꽃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했다. 본채 앞엔 가지가 축 늘어진 매실나무가 돌을 쌓은 나지막한 울타리 안에 담겨 있었고, 툇마루 아래 붉게 타오르듯 피어 있는 꽃은 개양귀비였다. 이 양귀비가 개양귀비인 건 아편이 나오지 않는 양귀비이기 때문이다. 수양버들처럼 늘어진 벚나무, 100일 동안 꽃이 핀다는 배롱나무, 태산목, 동백, 호랑가시나무, 보리수, 매화, 해당화… 마당은 아예 숲이다.

주민들은 이 마당을 ‘아미산 원림(峨嵋山 園林)’이라 부른다고 한다. 휴휴당 뒤편으로 누에 눈썹 모양의 아미산이 반교마을을 감싸고 있다. 가만있자…. 아미산은 다른 데도 있는데. 서울에 온 외국인들이 경복궁에서 연신 ‘뷰티풀’을 외친다는 곳, 경복궁 교태전 뒤편의 ‘아미산 정원’도 이 아미산과 한자가 같다.

휴휴당 뒤편 길 너머에는 주인의 텃밭이 있다. 배나무 복숭아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50m 길이의 이랑만 40개가 넘는다. 김 아주머니가 이젠 묻지도 않았는데 말을 이어간다. “저건 들깨, 요건 가지, 오이, 고추, 당귀, 도라지, 당근, 돼지감자도 있슈. 저 짝은 옥수수구유. 집주인 내외가 한국에 있는 채소는 다 가져다 심은규.”

휴휴당에는 담장이라 할 게 없다. 둥근 호박돌로 하나하나 쌓은 낮은 돌담만 있다. 그러고 보니 반교마을 집들이 대부분 그렇다. 마을 돌담 쌓기에 앞장선 사람은 임세빈(77) 할아버지였다. 1975년부터 반교장로교회 장로로 시무한 마을 어르신이다. 할아버지의 공식 직함은 반교리 돌담길보존회장.

“이 동네가 땅도 좁은디 가뭄이 심해유. 땅 파믄 다 돌이라 물이 쭉쭉 빠져유. 어디든 파면 돌담 하나 생기쥬. 청장님이 오셔서 얘기허다가 돌담 쌓아보자고 뜻이 맞았슈. 것 때미 등록문화재 지정도 됐구. 접때는 청장님도 같이 나와 돌을 들었슈. 일당 9만원 올려 품삯도 드렸쥬. 내 18번 한번 들어 볼라나.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 번 보고, 징검다리 건너갈 때 뒤돌∼아 보며, 서울∼로 떠나간 사라암∼, 천리타햐앙∼”

돌담 얘기를 하던 할아버지가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를 불렀다. 주민들은 벌써 5년째 돌담을 쌓고 있다. 지금까지 쌓은 총 길이는 약 2500m. 돌담길에 꽃밭을 조성하려고 30㎝씩 자기 집 안쪽으로 돌을 들여쌓는다. 자기 땅 10㎝라도 뺏기지 않으려는 게 요즘의 인지상정인데 여긴 그랬다. 둥근 돌을 골라 사다리꼴 모양으로 요령 있게 쌓는 기술. 이걸 인정받아서 마을 사람들은 지난해 부여 읍내에 새로 복원된 백제문화단지 돌담 구축 작업에도 뽑혀갔다.

반교마을은 해발 150m 고지대에 있어서 충남의 강원도로 불렸다. 서쪽 산을 넘으면 보령이라 서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비도 많고 눈도 많다. 골바람에 작물 보호하려 돌담 쌓던 궁벽한 산촌이 이제 그 돌담으로 정취를 만들어내고 있다.

주민들에게 유홍준은 아직도 ‘청장님’이다. 2004년 9월 문화재청장이 돼서 2008년 2월 숭례문 화재 사건 이후 정권 교체와 함께 물러났지만 마을에선 교수(명지대 미술사학과)란 현 직함이 쓰이지 않는다. 청장님에게 2005년 휴휴당 집터를 소개한 사람은 반교리 장동현(52) 이장이었다. 그는 휴휴당이 완공되자 당시 57세였던 유 전 청장에게 마을 ‘청년회’ 가입을 권했다. 환갑을 넘지 않았으니 청년 아니냐면서. 얼마 전 “올해는 청년회 졸업시켜 줄 거냐”는 유 전 청장의 말에 그는 “올해부터 청년회 나이를 65세로 늘렸슈”라고 대꾸했단다.

“농촌에 젊은 분들이 없슈. 환갑 무렵이 청년이유. 부락에서 우리 선배덜, 옛날 새마을운동도 해본 청장님 연배 비슷한 분덜이 마을가꾸기 주역이쥬. 애기 울음 끊긴 지유? 몇 년 됐쥬. 저그 광영이네가 제일 막내구먼. 시살(세살)이유.”

최근 5년간 외산면 전입인구는 1312명이었다. 전출은 1582명. 인구유출이 270명 수준에서 멈춘 건 그나마 다행이다. 부여 일대는 서울에서 차로 3시간 거리여서 유 전 청장처럼 ‘5도 2촌’을 꿈꾸는 이들이 꾸준히 유입된 덕이었다.

유 전 청장은 아직 반교마을로 전입신고를 하지 않았다. 부인 최영희(55)씨만 2007년 8월 서울 논현동에서 이곳으로 주소를 옮겼다. 외산면 면사무소 직원은 “전입신고 하시던 날 현직 청장님이 오신다는 얘기를 듣고 꽃다발 들고 기다렸는데, 청장님 내외가 흙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들렀다가 조용히 나가셔서 꽃은 나중에야 전해드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휴휴당의 남쪽은 돌담이 없다. 작은 시내가 흘러 담장 구실을 한다. 물가에 서 있는 정자의 이름은 ‘탁오대(濯吾臺)’. 이 현판은 퇴계 이황의 서체다. 조선 명종 때 충북 단양군수였던 퇴계는 나랏일에 심신이 피로할 때면 단양천 냇가에서 몸을 씻고 바위에 앉아 마음을 씻었다. ‘나를 깨끗하게 한다’는 뜻에서 그 바위에 ‘탁오대’란 이름을 주고 친필로 직접 새겼다. 휴휴당 ‘탁오대’ 현판은 각자(刻字) 장인이면서 무형문화재인 철제 오옥진 선생이 퇴계의 서체 그대로 새겨준 것이다.

시냇물 떨어지는 소리가 청량한데, 친절하게도 탁오대에는 목침까지 놓여 있었다. 주인이 여기서 무엇을 하는지 보지 않아도 모를 수가 없다. 정자에 올라 앞마당을 바라본 것은 취재를 위해 반교마을에 온 지 이틀째였다. 하루 만에 마당의 풀이 조금 더 웃자라 있었다. 풀이란 놈들이 오죽 빨리 자라면 더 이상 마당을 침범해오지 못하도록 기와를 깔아놨을까. 휴휴당 앞을 지나는 주민들마다 “아이구, 풀이 사람을 부르네유” 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6권의 부제는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 문화유적 답사를 다니다 보니 세상 어디든 나보다 솜씨가 나은 상수(上手)들이 있더라는 뜻이다. 반교마을 주민들은 어쩌면 휴휴당 주인보다 솜씨가 윗길인지도 모른다. 이 집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

이 책이 나오기 전부터 휴휴당은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났다. 일부러 이곳을 찾아 ‘답사’ 오는 이들도 꽤 많다고 한다. 그런데 반교마을에 머문 이틀간은 답사객을 만나지 못했다. 평일이어서인지, 주인이 없어서인지…. 사람 없는 휴휴당은 쉬고 있었다.

부여=글 우성규 기자, 사진 홍해인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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