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종 “시인은 감각의 고고학자”-모션 “삶과 예술 사이 변화에 관심”
제3회 서울국제문학포럼 정현종 시인-앤드류 모션 英 전 계관시인 대담
지난 25일 서울 세종로 교보빌딩 내 대산문화재단 응접실. 약속 시간인 오후 4시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 두 시인은 먼저 와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영국의 전 계관 시인이자 부커상 심사위원장인 앤드류 모션(59)과 한국의 정현종(72) 시인 사이의 대담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 격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대산문화재단 주최 제3회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초청받아 첫 방한한 앤드류 모션 곁에는 한국 출신의 부인이자 통역인 김경수씨가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다. 5년 전 뉴욕의 한 시낭송 축제에서 고은 시인의 통역을 맡았던 김씨를 보고 한 눈에 반해 연애를 시작했다는 앤드류 시인은 “바로 그해에만 대서양을 5번이나 건너 경수를 보러갔고 이듬해 경수가 짐 가방을 꾸려 영국으로 건너왔을 때 결혼했다”며 열정적인 사랑 이야기를 수줍은 듯 털어놓았다. 김씨는 “제가 아내이긴 이지만 아무런 사적 감정도 없이 통역할 것”이라고 웃음을 유도했다. 시적인 영감에 가득 찬 앤드류 모션과 정현종의 대화를 지상중계한다.
△앤드류 모션(이하 앤)=선생님이 입으신 파란색 윗옷이 아주 잘 어울리는군요. 어디서 샀나요. 내 옷과 바꿔 입었으면 좋겠는데.
△정현종(이하 정)=백화점에서 샀는데 서로의 아이덴티티(정체성)를 바꾸고 싶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앤=방금 전, 창덕궁 산책을 하고 와서 목이 마르네요. 맥주를 좀 마셨으면 좋겠어요.
(서로 돈을 내겠다며 지갑을 열었지만 앤드류가 먼저 현찰을 끄집어내자 정 시인은 ‘여비가 떨어지면 언제든지 말만 해라, 물론 꿔 주는 것이다’, 라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정=약력엔 시인이자 전기작가로 나와 있는데.
△앤=영국의 천재 시인 존 키츠(1795∼1821)와 필립 라킨(1922∼85)에 대한 전기를 썼지요.
△정=시인에 대해, 인간에 대해 아주 관심이 많은 것 같군요.
△앤=물론입니다. 그러나 두 시인의 경우는 내게 좀 다르게 다가오지요. 키츠는 내가 태어나기 전 시대의 사람이고 라킨은 내가 1976년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중부에 있는 헐(Hull)대학에 강사로 첫 부임했을 때 도서관에서 일하던 시인이었지요. 그는 당시에 50대 초반으로, 이미 대단한 명성을 지닌 시인이었고 난 23살이었는데 우리는 금방 친해졌어요. 라킨은 늘 존경스러운 스승이었습니다. 그는 수줍음이 많고 말도 더듬고 귀도 잘 들리지 않았는데 그래서 좀 쌀쌀 맞은 느낌이 있었으나 우리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 친구가 될 수 있었지요. 문제는 이제 나 역시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인데 나이가 들수록 사라지는 것이 있다는 게 안타깝지요.
△정=나 역시 제자들과 아주 가깝게 지냅니다. 전기를 썼다는 점에서 인간에 대한 당신의 관심이 강하게 느껴지는군요.
△앤=키츠도 그렇고, 라킨도 그렇고 인간으로서 그 사람들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나온 시들의 창작과정에 아주 관심이 많아요. 아시겠지만 예술이란 발작적으로 쏟아내는 것으로는 모자라지요. 삶과 예술 사이에서 어떻게 변화가 있는지 늘 궁금합니다.
△정=난 전기를 쓴 적은 없지만 학생들에게 수업 시간에 작가의 생에 대해 조사하도록 권고해왔어요. 작가의 생애 조사는 창작 수업에 아주 기본적인 것이지요.
△앤=한 작가의 생에 비해 작품이 적절하지 않다거나, 작품에 비해 생이 적절하지 않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어요.
△정=적절하다는 말은 매우 재미있는 단어군요. 하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서 생이 적절한지, 작품이 적절한지 가늠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지요.
△앤=생의 측면에서 제대로 살았느냐를 의미할 뿐, 절대적인 적절함의 수준을 얘기하는 건 아닙니다.
△정=한 작가의 생애는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보조수단일 뿐이죠. 생애를 통해 작품을 완전히 알 수는 없는 일이죠.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의 경우 모든 시적 이미지는 그의 생이 갖고 있는 실존적 인과관계를 뛰어넘은 것이었지요.
△앤=저 역시 동의한다. 예술이란 수동적인 반작용이 아니라 능동적인 행동이지요. 영국에서는 1920년대에 모더니즘 사조가 일어났는데 에즈라 파운드와 T S 엘리엇이 전통을 깨뜨리고 새로운 사조를 건설했지요. 한국도 그런 영향을 받았을 줄 압니다만.
△정=물론입니다. 나도 영향을 받았어요. 젊은 시절에 서양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았지요.
△앤=선생님의 작품을 봤을 때 전통적인 것을 현대로 끌어들이려는 경향이 느껴진다는 게 흥미롭더군요. 영국에서 내 시는 워즈워스, 토머스 하디, 라킨 등이 걸었던 잉글리시 라인(전통파) 계열이지요. 이 부류는 모더니즘과는 다른 부류인데, 그렇지만 전통을 따르면서도 모더니즘을 받아들일 수 있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시를 썼을 때 그 작품이 현대적인 감각에 호소력이 있으면 그 시가 모던하든, 전통적이든, 포스트모던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이겠죠. 그 분류는 비평가의 몫이지 시인의 몫이 아니지요.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쓰는 것이 시인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대학에서 문예사조를 가르치는데 시를 상징주의, 낭만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으로 분류해 가르칠 수는 없는 일이죠. 심지어 그것끼리 겹치는 부분이 있으니까요.
△앤=언제부터 시를 쓰셨나요.
△정=대학시절부터죠. 근데 마치 학생처럼 질문하고 있군요.
△앤=맞아요. 난 늘 학생처럼 묻지요. 시인은 늘 학생으로 살고 학생으로 죽어야 하죠.
△정=그게 시인의 자리이고 시인의 모습이지요. 한국엔 철이 들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요. 난 철이 안 드는 인간이지요. 철이 안 들었다는 건 분별력이 없음을 의미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마치 순진한 아이처럼 뭔가를 바라보고 경이감을 늘 간직하기 위해 철이 안 드는 것이죠. 그러나 나이가 들면 그게 참 힘들지요. 난 65세에 대학(연세대)에서 퇴임했는데 너무나 홀가분하더군요. 내가 지금껏 못했던 일, 예를 들어 음악을 듣는 게 너무 좋았지요. 퇴직 첫 해에 조그만 카세트 플레이어로 음악을 굶주린 사람처럼 들이마셨지요.
△앤=지금은 음악으로 배가 부르시겠군요.
△정=영국왕실에서 임명하는 계관시인으로 10년 동안 활동했던데.
△앤=10년 임기의 계관시인을 2년 전에 물러났습니다. 계관시인은 아주 보수적이고 권위있는 직위지요. 하지만 난 그런 전통에서 좀 벗어나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지요. 물론 왕실 행사에 대한 시도 썼지만, 시라는 과목이 수업에서 빠지지 않도록 학교나 교육단체를 찾아다녔지요. 시라는 것은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이라는 믿음에서인데, 시는 인생의 추가적이고 부수적인 게 절대 아니지 않습니까. 개인적으로 포이트리아카이브(www.poetryarchive.org)를 만들어서 인터넷으로 시를 보급하고 있지요. 교육적인 웹사이트인데 요즘엔 인기가 올라가서 한달에 200만명이 방문합니다.
△정=계관시인이면서 노동당을 지지한 배경이 궁금하군요.
△앤=사실 노동당은 사람들의 평등과 권리를 주장하고 세계의 불평등을 제거하자는 모토의 정당이 아닙니까. 시 역시 그렇지요. 노동당이 생각하는 평등한 사회와 시인으로서 평등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서로 비슷하다는 생각에서죠.
△정=저는 스페인의 시인 로르카에게 매료되어서 그의 작품을 번역 출간한 일이 있습니다.
△앤=그럼, 로르카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알고 있겠군요. 그의 아버지는 농부였는데 어린 로르카가 쟁기로 밭갈이를 하는 아버지 뒤를 따르다가 어느 날 평소보다 깊게 쟁기의 날이 흙에 박혔을 때 땅 속에서 로마시대의 유물을 발견하는 순간을 목격했지요. 바로 그 순간이 있었기에 로르카가 시인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정=난 시인을 감각의 고고학자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앤=맞습니다. 그래서 키츠가 ‘시는 생각이 아닌 감각’이라고 했지요. 쟁기로 파서 뭔가를 발견한 것은 무의식 그 자체였을 겁니다.
△정=무의식의 발굴이지요. 우리의 무의식 속에 무엇이 묻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요. 난 어린 시절에 시골에서 살았는데 모든 걸 손으로 잡아보고 혀로 맛보고, 오감으로 느꼈던 시절이 있었지요. 어릴 때의 경험이 모든 것의 원천이지요.
△앤=원천이라는 말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정=우리가 쓴 시는 사람들에게 살아있음을 확인시켜주고, 회복시켜주는 생물과 같은 것입니다.
△앤=우리가 이 땅에서 사라진 뒤에도 그렇게 되면 좋겠군요.
△정=당신의 시집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어보겠습니다.
△앤=저 역시 그러겠습니다. 이 만남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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