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2011년에 생각한다… 소통 부재의 시대 우리는 무엇에 공감하나

Է:2011-05-26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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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2011년에 생각한다… 소통 부재의 시대 우리는 무엇에 공감하나

공감은 역사다. 당신이 공감하는 인물이 역사를 만들고, 당신이 공감하는 문화가 시대를 정의한다. 오늘 한국 사회는 무엇에 공감하는가.

시대정서

독일 철학자 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는 한 시대의 공통적 이념과 정신적 양식을 시대정신(Zeitgeist)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성보다 감성, 이념보다 실리가 중시되는 지금, 나는 조금 더 말랑한 단어인 ‘시대정서’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고 느낀다.

이런 관점에서 올해의 시대정서는 ‘위로’라고 본다. 올해의 가수 임재범, 올해의 책 ‘아프니까 청춘이다’, 올해의 방송가 열풍인 ‘전 국민 오디션 프로그램’, 올해의 패션 트렌드 복고풍을 관통하는 정서는 위로다.

임재범 신드롬의 절정은 가스펠풍 노래 ‘여러분’에서 꽃을 피웠다. 실력파 가수의 열창도 이유였지만 수많은 관중이 기립 박수를 보냈던 까닭은 그 노랫말에서 찾을 수 있다.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내가 내가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야.’

메신저는 메시지만큼 중요하다. 이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기획형 가수가 아닌, 외톨이 가수 임재범이어서 우리는 더 위로받는다. 친구 한 명 없었던, 예민하고 광기 어린 성격에 대중과 멀었던, 조울증을 앓아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아내가 암 투병 중인, 딸을 위해 세상 밖으로 나온 임재범의 ‘결핍’에 ‘동질감’을 느낀다. 외로움은 인간의 숙명이고, 결핍은 인간의 본질이다. 고통의 심연을 느낀 임재범이 전하는 메시지는 가사가 아닌 고백이요, 위로다.

텔레비전에 노출될수록, 노출된 인물이 진정성을 가질수록,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 친근하게 다가올수록 대중은 유명인과 정서적 동질감을 느낀다. 심리학자는 이를 시청자와 유명인이 ‘유사 사회적 관계’를 맺는 현상이라고 분석한다. MBC ‘나는 가수다’에서 임재범이 목에 걸고 나온 싸구려 헤드셋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고, 그가 재기에 성공하는 것을 보며 함께 기뻐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교보문고 16주째 판매 순위 1위인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가 88만원 세대를 위로한 이 에세이는 제목 덕을 봤다. 제목을 지은 박시형(48·여) 쌤앤파커스 대표는 “작위적이지 않게, 사람들끼리 말할 때 화두를 던지는 듯한 화법이 독자의 공감을 샀다”고 했다. 만약 제목이 ‘청춘은 아픈 것입니다’였다면 독자의 마음을 지금처럼 사로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그 말 자체가 어깨를 토닥여주는 위로의 느낌이다.

지난해 화제가 됐던 KBS ‘남자의 자격-합창단편’, MBC ‘놀러와’가 만든 히트작 세시봉 열풍, 예능 프로그램의 주요 코드가 된 ‘귀농 열풍’도 위로의 시대를 증명한다. 사람들은 옛 것, 감동적인 것, 작고 소박하지만 진심이 우러난 것에 위로받는다. 눈물이 난다.

복지열풍

동시대를 사는 대중의 공감이 시대정서라면 정치인은 시대정서를 몸으로, 정책으로 표현하는 아이콘이다. 성장의 이명박, 참여의 노무현, 문민시대의 김영삼 대통령은 그 시대가 요구하는 것의 대표 상징이었다.

시대정서를 담지 못하는 정치는 생명력이 없다. 저항적인 1970년대 청년문화를 수용하지 못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시대는 종말하고 말았다. 권위의 상징인 박 전 대통령과 자유로운 청년문화는 대립했고, 결국 시대정서가 정치를 이겼다. 과거에는 정권이 전통문화를 복원하고 역사적 위인을 신격화해서라도 시대정서를 일부분 바꿀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로 대표되는 참여와 공감의 시대엔 문화가 정치보다 힘이 세다.

정책도 마찬가지다. 시대정서와 공명하지 않는 정책은 공감을 얻기 힘들다. 2011년 복지 담론이 활활 타오르는 것도 복지가 ‘위로의 시대’를 위로하기 때문이다. 지금 정서로는 ‘성장’보다 ‘복지’, ‘갈등’보다 ‘통합’, ‘개인주의’보다 ‘공동체’를 담는 정책이 호응을 얻는다. 사람들은 요즘 개천에서 난 한 마리 용이 되길 바라는 게 아니라, 개천에서도 수많은 용이 나올 수 있는 풍토를 꿈꾼다. 세계적 석학인 미국의 제러미 리프킨의 말처럼, 개인적 성공을 꿈꾸는 ‘아메리칸 드림’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공동체적 삶의 질을 꿈꾸는 ‘유러피안 드림’의 시대가 온 것이다.

문화는 정치보다 한 발 빠르다. TV는 그 어느 때보다 시청자와 소외계층의 간격을 좁혀놓았다. 복지 담론이 타오를 장작이 마련된 것이다. 중졸 학력의 환풍기 수리공 허각(엠넷 ‘슈퍼스타K’), 라면만 먹었다는 조선족 백청강(MBC ‘위대한 탄생’)이 공정한 심사를 통해 가수가 되는 과정에 감동을 느낀다. 한양대 성악과를 중퇴한 야식 배달부 김승일(SBS ‘스타킹’)이 무료 레슨을 받으며 꿈인 성악가에 한 발짝 다가설 때 눈물을 흘린다. 시청자가 허각, 백청각, 김승일이란 창을 통해 바라는 세상은 평범하거나 그보다 못한 사람도 공정한 경쟁을 통해 성공할 수 있는 사회다.

소외계층을 위한 문화교육 열풍도 뜨겁다. 지난해부터 한국판 ‘엘 시스테마’(베네수엘라의 빈곤층 자녀를 위한 공공 음악교육 프로그램)는 클래식계의 키워드였다. 어떤 조직보다 트렌드를 빨리 읽는 기업들은 소외계층 문화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인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서민정(36·여) 홍보팀장은 “지난해부터 소외계층을 위한 문화사업을 하자며 연락해오는 대기업이 부쩍 많아졌다. 전에는 없었던 현상이다”라고 했다.

보수 성향의 현 정권이 ‘공정사회’를 화두로 던지고, 한나라당 황우여 원내대표가 대학 등록금 완화를 추진하는 것도 이런 시대정서를 감지하기 때문이다. 2011년, 복지를 ‘포퓰리즘’으로 치부하고 진보진영의 담론으로만 해석한다면 시대를 짚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에게 복지는 ‘공짜 빵’이 아닌 ‘함께 나누는 빵’이다.

위로의 시대정서가 이어진다면 2012년 대선에선 복지·통합·공정의 아이콘이 당선될 것이다. 이 키워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얼마나 세련되게 이미지화하느냐, 누가 선점하느냐의 전쟁이다.

가장 강력한 대통령 후보인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는 이미 이쪽으로 가닥을 잡은 듯하다. 그는 2009년 5월 미국 스탠퍼드대 연설에서 ‘원칙이 바로 선 자본주의’(disciplined capitalism)를 대안으로 강조한 바 있다. “정부는 시장경제가 작동하는 과정에 문제가 될 소지를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공동체에서 소외된 경제적 약자를 확실히 보듬어야 한다”고 했다. 그해 10월에는 “아버지의 꿈은 복지국가였다”고 말했다. 진보진영의 ‘무상 시리즈’와 차별화하면서 시대 흐름과 어우러지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지난 4·28 재·보궐선거에서도 이런 흐름은 나타났다. 보수진영의 천국이었던 경기 분당에서 민주당 손학규 대표가 당선됐다. 한나라당 강재섭 후보는 전쟁터에 나온 전사적 이미지였고, 손 후보는 전쟁터에 나온 위문공연단 같았다.

“사람들이 지쳐 있다. 피로를 느낀다. 이제껏 소신 강한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라 바꾸는 과정에 노이즈(소음)가 발생했다. 지금은 상처의 치유, 행복한 변화에 대한 열망이 있다고 본다. MB정부에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며 과격한 전략을 썼다면 공감을 사지 못했을 것이다.” 손 대표를 도왔던 이철희(47) 민주당 전략기획위원회 부위원장의 말이다. “분당 선거는 6·25 전쟁의 낙동강 전투”라는 강 후보 발언은 위로 받고 싶은 정서를 더욱 피곤하게 했을 것이다.

공감을 얻는 데 중요한 요소는 동일시다. 나와 비슷해 보이는 후보가 내 처지를 잘 이해할 것 같은 법이다. 정돈되고 고급스런 이미지인 분당의 중산층은 주로 파란 점퍼를 입었던 강 후보보다 줄곧 정장을 입은 손 대표를 택했다. 정장이 파란 점퍼를 이겼다.

과잉고백

위로의 시대 2011년. 진솔한 고백, 눈물의 고백, 치유의 고백이 올해 아이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자신의 결함을 고백한다고 누구나 임재범이 될 수는 없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영리하다. 지나친 고백에 지치고, 계획된 고백에 공감하지 않는다.

SBS ‘강심장’, MBC ‘무릎팍 도사’ 등 수많은 방송 프로그램에서 연예인들은 사연을 고백한다. 26일 네이버 검색창에 ‘고백’을 치면 그들이 텔레비전에서 토로한 수많은 사연이 나온다. ‘탤런트 채시라 남편 김태욱 불치병 고백, 2000년 목소리 영영 잃을 것 선고’, ‘가수 유지나, 나 때문에 숙박업소서 일한 어머니 눈물 고백’, ‘김완선, 홍콩 원정 출산설? 지인에 배신당해 힘들었다 고백’, ‘44사이즈 김완선, 라이벌 이지연 이기려 다이어트하다 응급실행 고백’….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한 연예인 지망생들은 사생활을 숨기지 않는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시청자에게 다가가 힘든 가정환경을 토로한다. 대중은 처지가 딱한 유명인을 헐뜯지 않는다. 유명인은 고백을 주고, 대중은 지지를 약속한다. 일종의 거래다.

그러나 끊임없이 사연을 고백하며 눈물 흘리는 연예인에게 대중은 곧 피로감을 느낄 것이다. ‘동정 피로증’이다. 늘 고민을 들어주는 정신과 의사, 환자를 돌봐야 하는 간호사의 심리 상태와 비슷해지는 거다. 오히려 수많은 고백에 노출된 대중은 그중 ‘진짜 고백’이라고 느끼는 것에만 열광하게 된다. 대중이 임재범에게 열광하는 이유와 같은 맥락이다.

때론 대중이 고백을 강요한다. 가수 서태지와 배우 이지아의 뒤늦은 결혼과 이혼 소식이 알려지면서 대중은 결혼 소식을 알리지 않았던 이들에게 분노했고, 해명을 요구했다.

이런 고백산업의 이면에는 ‘공감’이 아닌 ‘동정’이 작용한다. 공감은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평등적 행위지만, 동정은 은혜를 베푸는 시혜적이고 수직적 행위다. 공감은 타인의 기쁨에도 함께 기뻐하는 것이고, 동정은 타인의 슬픔에만 슬퍼하는 것이다.

2011년 위로의 시대. 타인에 대한 공감과 동정이 교차하는 사회, 트위터와 페이스북이 ‘공감’와 ‘동정’ 사이에서 어디로 향할지는 지켜볼 일이다.

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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