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조미자] 잃어버렸던 순간들
출근하려고 시동을 거는데 차가 앓는 소리를 낸다. 어젯밤 실내등을 켠 채 내린 게 생각났다. 보험회사에 연락했더니 오는 데 15분 쯤 걸릴 거라고 했다. 직장까지는 버스 세 정거장 거리. 오늘은 걸어보리라 맘먹었다.
첫 번째 정거장을 지나쳤다. 손님을 싣고 꽁무니를 빼는 버스에 혀를 내밀어본다. 버스와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 우쭐해본다. 벌써 아침을 시작한 도로의 인부들은 벽돌을 쌓기 위해 줄눈을 늘어뜨린다. 곧은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그들에게 경의를 표해본다.
햇살 속의 핏빛 철쭉꽃을 보니 현기증이 일 것 같다. 겨우내 암울한 회색과 하얀 눈 속에 파묻혀 있던 사람들에게 환희를 주고 싶은 꽃들의 배려일 것이다. 꽃들은 순서를 지킬 줄 안다. 생강나무 산수유가 노랗게 봄을 열더니 벚꽃이 지니까 붉은 시작을 알린다. 철쭉이 뚝뚝 꽃잎을 떨굴 즈음 수수꽃다리와 아카시아꽃이 낮으로는 뻐꾸기를, 밤으로는 소쩍새를 데리고 여름을 맞을 것이다.
교회 앞을 지나니 이번 주 봄 나눔 주간에 작곡가를 초빙했다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제목만 말해도 알 만한 노래를 만든 사람이라 호기심이 동했다.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었다. 음악과 함께 하는 그의 나눔의 세계는 봄을 어떻게 부를까? 남다른 열정과 촉촉함이 있을 텐데. 오랫동안 연모해온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설렘으로 발걸음이 날개라도 돋친 양 가볍다.
두 번째 정거장이 가까워온다. 뒤에서 경적 소리가 들렸다. 택시 기사가 창을 열고 나를 쳐다본다. 나를 따라온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이 거리에서 걷는 이는 혼자뿐이다. 손사래를 치자 괜한 시간 버렸다는 듯 휑하니 달아난다. 매일 운전하는 남동생도 저런 모습으로 손님을 찾고 있을 텐데, 아침부터 기사에게 혼돈을 주었다고 생각하니 맘이 불편하다. 미안한 맘에 길가에서 떨어져 운중천 쪽으로 걸어간다.
물가에서 포클레인 소리가 들려온다. 작년 여름 물이 넘쳤던 시내의 폭을 넓히려나보다. 밤이면 들리던 물소리와 개구리 울음소리는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았다. 가끔 백로가 날아왔었다. 물가 한가운데 목을 길게 내밀고 고향을 꿈꾸는 모습을 보기도 했는데. 밤으로는 청둥오리가 유영하며 목쉰 소리로 울기도 했는데. 당분간 백로가 날아갈까 봐 발소리를 죽이고 산책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세 번째 정거장이 보인다. 느티나무가 있는 사각화단에 민들레가 금단추처럼 피어 있다. 그 옆에는 하얀 씬냉이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자동차 경적을 자장가 삼아, 배기가스를 향기 삼아 꽃을 피우다니.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그 시끄러움에 눈멀고 귀먹어도 희망을 피우는 법을 보여주는 것 같다. 큰 나무 그늘에 기대 사는 그것들을 보며 월세 전세로 살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우리네 사람살이를 보는 것 같다. 다 자란 민들레는 홀씨를 날릴 준비를 하고 있다. 꽃들은 씨앗을 맺기 위해 지는 것을…. 그렇다면 이것은 오늘 도보의 선물일까. 잃어버렸던 순간들을 다시 살려내기 위한 시간이었던가?
조미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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