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포된 후세인, 사살된 빈 라덴… ‘최후’ 왜 달랐나
부시-오바마의 PR戰
2003년 12월 13일 오전 11시50분. 이라크 북부 티크리트 외곽의 아드와르에 장갑차와 헬기로 무장한 미군 600여명이 급파됐다. 작전명 ‘붉은 새벽(Red Dawn)’. 비밀작전 특수부대 ‘태스크포스121’ 요원들은 한적한 농가 두 곳을 수색했다.
‘울버린1’과 ‘울버린2’, 암호명이 붙은 두 농가에는 목표물이 없었다. 수색 범위를 넓히면서 AK소총을 든 이라크인 2명이 황급히 달아나는 게 목격됐다. 그들이 있던 곳은 초라한 창고다. 바닥의 카펫을 들추니 깊이 1.8m 작은 땅굴에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있었다. 그는 생포됐다.
2011년 5월 1일 오전 1시.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 북쪽의 아보타바드로 미군 헬기 4대가 네이비실(해군특전지원단·Navy SEAL) 대원들을 태우고 출격했다. 작전명 ‘제로니모 E-KIA’. 높이 5.5m 담장에 가려진, 100만 달러가 넘는 고급 맨션에 오사마 빈 라덴이 있었다. 미군이 총격전 끝에 마주한 빈 라덴은 “저항했지만 총을 들진 않은” 비무장 상태였다. 그는 사살됐다.
폴 브레머 이라크 미군정 최고행정관이 후세인 체포 사실을 발표하며 했던 첫마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백악관 상황실에서 빈 라덴 급습작전을 지켜보다 나지막하게 내뱉었다는 한마디는 같다. “We got him(그를 잡았다).” 이렇게 9·11 테러 이후 미국이 ‘적’으로 지목한 후세인과 빈 라덴은 죽었다(후세인은 긴 재판 끝에 2006년 12월 30일 교수형 당했다). 두 사람의 최후,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둘에게 최후를 안기고, 그것을 세상에 알린 미국의 방식이 꼭 조지 W 부시와 버락 오바마의 차이만큼 달랐다.
후세인을 체포했다고 발표하던 날, 미군은 머리카락 헝클어진 ‘포로’ 후세인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공개했다. 트레이드마크인 군복 대신 흰 티셔츠에 구겨진 검정 재킷을 입었고, 단정한 콧수염은 덥수룩한 턱수염으로 바뀌어 있었다. 카메라는 시종 그의 초췌한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건강상태를 조사받느라 미 군의관 앞에서 감기환자처럼 “아∼” 하고 크게 입 벌린 모습, 군의관이 그의 몸에 이가 있는지 살펴보는 장면도 담겼다.
부시 정부는 “이라크인들에게 더 이상 후세인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영상을 공개했다고 밝혔다. 이 장면은 아랍권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 의장이던 레나토 마르티노 추기경조차 “미군이 후세인을 마치 소 다루듯 했다(소가 건강한지 이빨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는 뜻). 나도 그에게 동정심이 들었다”고 지적했다.
이에 앞서 바그다드 함락 석 달 뒤인 2003년 7월, 후세인의 두 아들 우다이와 쿠사이가 저항세력을 이끌고 미군과 전투하다 사망했다. 도널드 럼즈펠드 당시 미 국방장관은 두 시신의 피투성이 사진을 공개하고, 기자들을 불러다 시신을 보여줬다. 역시 “이라크인들이 믿지 않을까봐”였고, 이를 위해 시신을 방부 처리해 가며 11일간 보관하다 매장했다. 24시간 안에 매장하는 이슬람 관습은 고려되지 않았다.
후세인은 바그다드 미군기지에 구금됐고, 2005년 10월 특별법정에서 재판이 시작된 지 1년2개월 만에 처형됐다. 이 과정에서 노출된 그의 모습은 하나같이 초라하다. 감옥에 앉아 밥 먹는 모습, 옷 갈아입느라 팬티만 입고 있는 사진, 교수대에 올라서서 어리둥절해 하다 목에 밧줄이 드리워지는 처형 동영상까지 언론에 공개됐다.
후세인이 생포돼 겪은 이런 상황, 빈 라덴에겐 벌어지지 않았다. 백악관에 따르면 네이비실 대원들은 총을 들고 있지 않던 그를 사격했고, 쓰러진 뒤에도 두 차례 ‘확인사살’했다. 이건 원래 생포할 의사가 없었다는 뜻이다. 로이터통신은 미 정부 고위 당국자의 말을 인용해 “네이비실에 내려진 명령은 생포가 아닌 사살이었다”고 보도했다.
빈 라덴 사살 이후 공개된 사진은 그가 숨진 방의 흐트러진 침대와 맨션의 외부 전경뿐이다. CNN 등 미국 언론은 연일 특집 프로그램을 내보내면서 빈 라덴의 예전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 얼굴에 총 맞은 시신을 촬영했지만 “참혹하고, 무슬림의 분노를 유발할 수 있다”며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백악관 상황실로 중계됐다는 작전 상황 영상도 아직 미공개 상태다. 빈 라덴 사살은 분명 미국의 ‘복수’였고 비무장 개인에 대한 국가의 ‘암살’이라는 비판을 받지만, 어쨌든 그 사실은 전투와 죽음의 이미지를 극도로 배제한 채 세상에 알려졌다.
바그다드가 함락된 지 20여일 만인 2003년 5월 1일. 부시 대통령은 미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호 갑판에서 ‘유명한’ 종전선언 연설을 했다(이 연설이 유명해진 건 그의 종전선언 이후 더 많은 미군이 이라크에서 사망해 부시를 조롱하는 소재로 회자됐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꼭 8년 만인 2011년 5월 1일. 오바마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빈 라덴 사살 소식을 전하는 대국민 연설을 했다. 후세인의 몰락을 선언한 부시의 연설과 빈 라덴의 죽음을 알린 오바마의 연설, 그림부터 달랐다.
부시는 공군 파일럿 차림으로 미 해군 초계기 S-3 바이킹을 타고 이라크에서 귀환하던 링컨호에 착륙했다. 미 역사상 대통령이 제트기로 이렇게 위험한 착륙을 시도한 건 처음이다. 양복으로 갈아입고 링컨호 갑판 연설대에 선 그의 뒤에는 ‘Mission Accomplished(임무 완수)’라고 적힌 대형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환호하는 군인들을 향해 그는 환하게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오바마는 웃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백악관 이스트룸에 섰다. 그는 대통령 선거를 치르며 “빈 라덴을 잡기 위해서라면 파키스탄에서 미군 단독 작전도 강행하겠다”고 주장했다가 ‘순진한 발상’이란 비판에 시달렸다. 그 비판자들에게 자신이 옳았음을 보여준, 부시가 못한 걸 해낸 순간이었지만 이 자리에선 얼굴에 미소를 드러내지 않았다.
부시의 ‘Mission Accomplished’ 연설과 오바마의 이스트룸 연설 사진을 보면 부시는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으로, 오바마는 ‘빈 라덴의 죽음에 별로 기뻐하지 않는 미국 대통령’으로 보이고 싶어 했음이 읽힌다.
2003년 12월 15일, 후세인 체포 이틀 만에 부시 대통령은 예정에 없던 기자회견을 했다. 후세인에 관한 코멘트를 하려고 급히 마련된 자리에서 그는 “속이 시원하다”고 했다. “후세인은 사기꾼이고 거짓말쟁이며 살인자”라고도 했고, 취재진이 후세인에게 전할 개인적인 메시지를 묻자 “미스터 사담 후세인, 당신 없는 세상은 더 나아졌다”고 말했다.
오바마의 이스트룸 연설문에는 알카에다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대신 “정의가 이뤄졌다(Justice has been done)”는 표현이 사용됐다. “빈 라덴은 무슬림 지도자가 아니라 무슬림을 살해한 테러리스트”라고 강조하는 대목도 나온다. 그는 “미국은 결코 이슬람세계와 전쟁을 하는 게 아니며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칼럼니스트 클리프 쿠앙은 웹진 ‘코디자인’에 올린 글에서 “미국 정부의 대테러 PR(홍보)전이 예전보다 많이 세련돼졌다”고 평가했다. 북아프리카 민주화 시위에서 드러났듯 트위터 등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이슬람세계의 여론을 좌우하는 상황에서 빈 라덴의 죽음이 폭력과 피와 복수의 이미지로 공개됐다면 어떤 반발을 불러올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알카에다의 최대 무기는 무슬림 젊은이들에게 반미 메시지를 전파하는 PR이다. 이번 PR전쟁에선 아직까지 미국이 지지 않았다”고 했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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