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가 꽃필 때 런던 뒷골목 극빈층은 사회적 살인을 당했다

Է:2011-04-28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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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꽃필 때 런던 뒷골목 극빈층은 사회적 살인을 당했다

‘밑바닥 사람들’/잭 런던/궁리

20세기 초 영국 런던은 세계의 중심이었다. 빅토리아 시대(1837∼1901)의 영광은 저물었지만 영국은 여전히 세계 산업생산의 10%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늙은 거인을 괴롭히던 보어전쟁(1899∼1902)은 승리로 마무리됐고, 조만간 유럽을 초토화시킬 양차 세계대전도 10여년 뒤의 일이었다. 밝아오는 20세기가 전쟁과 광기로 질주할 것임을 유럽의 가장 비관적인 지성조차 짐작 못하던 낙관의 시대. 젊고 혈기왕성한 자본주의와 세상의 비밀을 알려줄 과학. 이 두 가지 무기를 찾아낸 인류의 미래는 명랑해보였다. 폭력, 빈곤, 야만, 무지. 인간을 괴롭혀온 악은 역사상 처음으로 종말을 향해가고 있었다. 과연?

미국 작가 잭 런던(1876∼1916)의 ‘밑바닥 사람들’은 문명사적 절정을 가장 역설적으로 포착한 르포르타주이다. 유럽문명의 심장이자 과학과 이성의 최전선이었던 런던이란 도시가 세련되고 우아한 근대의 완성을 축하하던 시절, 저자의 시선은 악취를 풍기며 썩어가는 도시의 하수구로 향했다. 그리고 묻는다. 근대는 원하던 진보를 성취했는가.

잭 런던은 1902년 여름 런던의 최하층 슬럼 이스트엔드에 잠입해 극빈층의 삶을 살았다. 런던 북동부 템스강 북안의 이스트엔드는 산업혁명 이후 형성된 공장 및 항만을 중심으로 최하층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극빈지구였다. 런던 중심가에서 마차로 고작 몇 분 거리인 이스트엔드에 가는 건 아프리카나 티베트 오지를 방문하는 것보다 힘겨웠다. 친구도, 여행사도, 거리의 마부도 “유례가 없는 일”이라며 그의 방문을 말렸다. 마부를 설득해 이스트엔드로 향한 잭 런던은 헌옷가게에서 10실링에 산 낡은 옷을 걸치고 실직 부두 노동자로 변신했다.

옷을 바꿔 입자 삶은 참담해졌다. “너무도 빨리! 눈 깜짝할 새에, 말하자면 그들과 같은 사람”이 돼버린 것이다. 교차로에서 차는 피하지 않고 돌진했고, 기차역 매표원은 당연하다는 듯 3등석 표를 내밀었다. 셔츠 안쪽에 비상금으로 금화 하나를 꿰매 넣은 그는 이스트엔드를 종횡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구빈원을 전전하고, 구세군의 아침식사 한 끼를 위해 3시간동안 줄을 서고, 밤거리를 헤매며 노숙했다. 오물 냄새 가득한 차 한 잔과 돌덩이처럼 딱딱한 빵 한 조각을 강제노역과 바꿨고, 맥주 원료 홉(hop)을 따는 하루의 노동으로 한 끼 식사 값에도 못 미치는 돈을 벌었다.

굶주림은 이스트엔드의 끼니였다. 사람들은 좁은 인도에서 쓰레기를 집어먹었다. 오렌지껍질, 사과껍질, 포도 줄기, 빵 부스러기, 심지어 너무 더러워 정체조차 알기 어려운 사과 심까지 주워서 우물댔다. 아이들의 식당은 진창의 쓰레기더미였다. 썩어가는 오물을 먹고 자란 거리의 아이들은 왜소하고 병약한 런던의 신인류, 빈민으로 자라났다.

이스트엔드의 또 다른 특징은 대낮에 공원 벤치에서 조는 사람들이었다. 무기력하게 고개를 떨어뜨린 채 자고 또 자는 이들. 원인은 부족한 주거공간이었다. 런던의 도시개발은 빈민을 빈민가에서 몰아냈다. 갈 곳은 줄어들고 ‘굴’보다 못한 단칸방 임대료는 끝없이 올랐다. 하숙집, 시영숙소, 노동자숙소, 간이숙박소의 방은 임대된 뒤 다시 일부가 재임대되고, 또 일부가 임대됐다. 그렇게 가로 세로 2m 남짓의 방 80칸에 300여명이 우글댔다. 침대 하나와 방바닥이 8시간씩 6명에게 교대로 사용되는 일도 흔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빈촌 이스트엔드의 임대 수익률은 부촌 웨스트엔드보다 높았다.

8시간의 방바닥조차 빌릴 수 없는 이들은 거리를 떠돌았다. 노숙이 불법이었기 때문에 경찰은 도시 곳곳에서 잠든 이들을 깨워 쫓아냈다. 그래서 야간경찰이 철수하는 새벽이 되면 공원에는 밤새 추위와 졸음에 시달린 빈민들이 모여들었다. 굶주림과 노숙. 결과는 죽음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서서히 죽어나갔다. 그건 사회적 살인이었다.

1902년의 런던과 2011년의 서울 빈민가. 누군가는 양자의 연관성을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성인 인구의 4분의 1이 빈민구제기관에서 생을 마치던 100년 전의 런던을 서울과 비슷하다고 말하는 건 과장이다. 다만 깨달음은 분명했다. 안전망을 치운, 맨얼굴의 자본주의 속에서 삶은 극단적으로 비참해졌다. 그들의 오류를 우리는 반복할 것인가.

저자는 가난의 풍경을 이렇게 마무리 지었다. ‘노동자 한명이 1000명을 위한 신발과 250명이 입을 모직 옷을 생산할 수 있는 시대(근대를 말하는 것이겠다)에, 사회는 인간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20세기 잭 런던 식 표현이 사회의 ‘관리’였다면, 21세기 한국식 어법은 ‘복지’가 될 것이다.

잭 런던은 41년의 짧은 생애동안 40여편의 작품을 쏟아냈다. 평단은 그의 거칠고 직설적 표현과 다작에 고개를 돌렸지만, 대중은 달랐다. 노동자였던 작가 자신의 삶과 당대 현실이 녹아든 설득력에 독자는 열광했다. 신생 자본주의 미국의 계급갈등을 그린 ‘강철군화’와 동물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늑대개’가 대표적.

‘밑바닥 사람들’에서도 잭 런던은 저널리스트의 객관을 가장하지 않았다. 고발하는 대신 분노했고, 관찰하는 대신 공감했다. 국내 초역. 전문 번역가 정주연 옮김.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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