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규장각 도서 1차분 75권이 145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1866년 프랑스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를 이유로 함대를 파견, 병인양요를 일으켰다. 프랑스 해군은 당시 강화도 외규장각에 있던 조선왕실 의궤 340여권, 지도 2점, 족자 7개, 대리석판(옥책) 3개 등을 약탈하고 나머지는 불태웠다.
외규장각 도서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1975년. 이곳에서 촉탁 직원으로 일하던 재불 역사학자 박병선(83)씨가 별관 창고에 ‘파지(破紙)’로 분류된 채 먼지에 파묻혀 있던 외규장각 도서의 존재를 처음 확인하고 한국에 알렸다.
프랑스 국립박물관 측이 이 일을 문제 삼아 해고했지만 연구·조사를 계속한 박씨의 노력은 국내 학계 등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90년대 초 약탈의 불법성이 제기되면서 반환운동의 물꼬가 터졌다. 91년 서울대는 총장 이름으로 외무부에 반환요청 의뢰서를 제출했으며, 이듬해 한국 외무부는 프랑스 외교부에 정식으로 반환을 요청했다.
93년 우리나라가 고속철 테제베 도입을 앞둔 시점에서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약속했으나 확인된 298권 중 ‘휘경원원소도감의궤’ 한 권만, 그것도 3년 단위 갱신 대여방식으로 돌려받았을 뿐 나머지는 진척이 없었다. 당시 열린 양국 정상회담 때 김영삼 전 대통령이 외규장각 의궤를 장갑도 끼지 않고 맨손으로 만지는 모습을 지켜본 프랑스 관계자들이 기겁을 하며 반환에 난색을 표했다는 후문이다.
99년부터 민간대표 간 협상을 벌여 2001년 ‘등가등량 교환방식’에 합의했으나 국내의 거센 반발로 무산됐다. 이후 잠잠하다 2007년 시민단체인 문화연대가 약탈문화재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있는 프랑스 국내법을 문제 삼아 프랑스 행정법원에 반환소송을 내면서 다시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러다 지난해 11월 주요20개국(G20) 서울회의에서 한국·프랑스 정상 간 합의문 발표에 이어 올해 2월 7일 협상대표 간 합의문 서명과 3월 16일 실무 약정서 서명으로 외규장각은 마침내 귀환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에서는 “한국이 외규장각 도서를 다시 약탈해 간다”는 인식이 팽배하고, 협상 차 한국에 온 일부 실무진의 경우 아쉬움에 눈물까지 흘리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여 최종 서명까지 진통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4차례에 걸쳐 이번에 돌아오는 297권 중 ‘풍정도감의궤’ 등 30권은 외규장각에만 있는 유일본이고, ‘장렬왕후존숭도감의궤’ 등 11권은 제작 당시의 비단 장정 유지본으로 사료적 가치가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또 임금이 열람하는 최고급 어람용이 대부분으로 왕과 왕비의 국장(國葬), 세자와 세자빈의 예장(禮葬), 왕실의 가례(嘉禮) 등을 기록해 이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외규장각 도서 귀환은 5년 단위 갱신 대여방식이지만 사실상 영구임대로, 약탈당한 우리 문화재를 우리가 보관·관리하게 됐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를 계기로 해외에 유출된 다른 한국 문화재 환수에도 힘을 얻게 됐다.
하지만 프랑스에 소유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연구 등 활용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국보나 보물 등 국가문화재 지정도 할 수 없다. 다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가능하기 때문에 프랑스와 협의를 통해 추진해야 할 과제다.
많은 전문가들은 외규장각 도서가 전부 들어온 뒤 영구임대나 소유권 반환 등 실질적으로 돌려받을 수 있도록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견해다. 서울대 국사학과 이상찬 교수는 “임대 형식을 떠나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 환수를 관철시켰다는 점에서 한국이 한 등급 올라갔다고 본다”면서 “소유권 및 관리권 문제는 희망을 갖고 협상에 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광형 선임기자, 양진영 기자 g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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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외규장각 도서] 우여곡절 끝에… 우리 것 ‘임대’ 하는데 145년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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