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의 씨네마 부산-PIFF 15년의 기록 (13)] 세계 3대 영화제(칸·베를린·베니스) 수장, 부산에 모이다
2001년을 전후해 칸과 베를린, 베니스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이 모두 교체됐습니다. 23년간 장기 집권한 질 자코브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은 회장으로 옮겨 앉고, 뤼미에르영화박물관장인 티에리 프레모가 후임이 됐습니다. 질 자코브는 여전히 뒤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베를린영화제도 2000년 50주년 행사 직후에 22년간 집권하던 모리츠 데 하델른이 해임되고, 독일 최대 지방영화진흥기구 책임자인 디이터 코슬릭이 부임했습니다. 2001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취임하면서 이탈리아는 베니스비엔날레, 영화아카이브, 국영방송사 등 문화계 수장들이 전격 교체됐습니다. 베니스영화제 집행위원장도 알베르토 바르베라가 임기 중 물러나고, 베를린에서 해임된 하델른이 위촉됐습니다.
21세기를 맞아 세계 영화계의 변화가 예고된 것입니다. 저는 이 3대 영화제의 새 집행위원장들을 모두 부산에 초청하고 싶었습니다. 이들이 자기들 영화제에서 서로 만나는 경우는 자주 있지만, 다른 영화제에 함께 참석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부산영화제 위상도 높이고 이들과 친교를 맺는 일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칸·베를린·베니스 거물들, 부산에
칸영화제부터 공략했습니다. 매년 1월 말 열리는 로테르담영화제와 2월 10일 전후로 개최되는 베를린영화제 사이에 3∼5일 간격이 있습니다. 저는 이 기간에 파리에 들러 칸영화제 집행위원장과 영화선정 책임자들을 만나 제작 중인 한국영화를 소개하며 칸영화제에서 선정할 만한 영화들을 추천했습니다. 1998년 이후 일관된 제 행보였습니다. 한국영화의 로비스트 역할을 한 셈이죠.
2001년 2월 3일, 칸영화제 사무실을 찾아 질 자코브 회장, 영화선정 책임자인 크리스천 존, 질 자코브의 친구인 영화평론가 피에르 리시앙이 함께한 자리에서 티에리 프레모 신임 집행위원장과 인사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심사위원장 자격으로 부산을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프레모는 “부산영화제 얘기를 많이 들었다. 방문하고 싶지만 내년에나 고려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해 5월 칸영화제에서 만나 또 요청했습니다. 그는 6월까지 답변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때마침 6월 초에 프랑스시네마테크 주최로 ‘임권택 감독 회고전’이 파리에서 열렸고, 저는 파리로 달려갔습니다. 회고전 개막행사 뒤 장재룡 대사, 손우현 문화원장, 임권택 감독, 유길촌 영화진흥위원장과 인근 카페에서 칼바도스 두 병을 비우고 호텔로 돌아온 다음날. 첫 일정이 프레모, 리시앙과의 조찬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프레모는 부산에 오겠다고 확답했습니다. 취임 후 해외영화제 첫 방문지로 부산을 택한 것입니다. 삼고초려 끝에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베를린영화제는 또 다른 경로를 밟았습니다. 디이터 코슬릭은 2001년 베를린영화제를 전임 위원장의 ‘퇴임 기념 영화제’로 만들어 본인은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좀처럼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프로그래머인 도로시 베너에게 코슬릭을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녀의 역할이 주효해서 그는 부임 첫해에 부산을 찾았습니다. 2001년 제6회 부산영화제에는 칸과 베를린 집행위원장이 함께 방문했습니다.
다음 목표는 베니스. 모리츠 데 하델른을 2001년 9월 베니스영화제에서 만나 부산 방문을 요청했습니다. 2002년 5월 칸에서 다시 만났을 때 재차 부탁했습니다. 그는 “(내가) 살아남으면 참석하겠다”고 했습니다. 베니스영화제와 1년 계약을 한 상태였기에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계약이 연장된다면’ 부산에 오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2002년 제7회 부산영화제에는 칸과 베를린 집행위원장이 두 번째로 찾아오고, 베니스 집행위원장이 합류했습니다. 변방의 신생 영화제에 세계 3대 영화제 수장이 모두 참석한, 흔치 않은 일은 외신을 타고 세계 영화계로 퍼졌고 각 영화제 관계자들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Director’s Chair
2001년 6회 부산영화제가 끝나자마자 저는 유럽연합 산하 유럽영화아카데미로부터 공문을 받았습니다. 그해 12월 1일 베를린에서 ‘영화제의 미래 역할’이란 주제로 열리는 ‘영화제정상회의(Summit Meeting of the Film Festival Directors)’ 초청장이었습니다. 참석자는 저를 포함해 칸의 티에리 프레모, 베를린의 디이터 코슬릭, 베니스의 알베르토 바르베라, 토론토의 피어스 핸드링, 선댄스의 제프리 길모어, 카를로비 바리의 에바 자하로바, 산세바스티안의 미켈 올라치레기 등 ‘주목받는’ 영화제 집행위원장 8명이었습니다. 프레모는 다른 일정으로 참석치 못해 로테르담의 산드라 덴 하머 공동집행위원장이 초청됐습니다.
모두 잘 아는 사이였지만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영화제 위원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는 점에서 저는 흥분을 가누지 못했습니다. 세계 각국의 영화인과 기자 600여명이 가득 메운 베를린의 축제극장에서 유럽영화아카데미 부회장(회장은 빔 벤더스 감독) 디이터 코슬릭의 사회로 회의가 열렸습니다. 각 영화제 소개 필름 상영, 집행위원장 소개, 해당 위원장의 주제 발표(10분)에 이어 단상의 의자(디렉터스 체어)에 모두 앉아 국제비평가연맹 말콤 데렉 회장과 관객의 질문에 답변했습니다.
다음 해 5월 칸영화제 기간 중 영화잡지 ‘버라이어티’가 주최한 포럼에서도 저를 포함해 영화제 집행위원장 9명이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가졌습니다. 이처럼 세계에서 10명 미만의 영화제 집행위원장을 초청하는 국제회의에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에서 유일하게 ‘부산’이 초청된다는 사실은 고무적이었습니다. 창설된 지 불과 6년 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2001년(6회)과 2002년(7회)에는 특기할 일이 많았습니다. 두 해 모두 11월에 부산영화제가 열렸습니다. 극장을 빌려 영화제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9월 말, 10월 초가 추석연휴여서 극장가 ‘추석대목’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추위 때문에 명물인 야외상영이 취소됐습니다. 6회는 부산전시컨벤션센터, 7회는 1700석 부산시민회관에서 열었습니다. 1700석은 턱없이 부족해서 개막식을 광케이블로 외부 모니터에 동시 중계했습니다. 칸영화제처럼 블랙타이 착용을 요청하는 드레스 코드를 처음 적용했고, 해운대 스폰지백화점의 메가박스 10개 스크린이 완공돼 영화제 전용관으로 사용했습니다. 부산영화제의 ‘해운대 시대’가 열린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뉴커런츠 심사위원들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제6회 심사위원장은 한국을 처음 방문했던 대만의 허우샤오시엔 감독, 심사위원은 논지 니미부트르(태국 감독), 피터 반 뷰렌(네덜란드 언론인), 폴 클락(뉴질랜드 교수)과 윤정희였습니다. 심사가 끝난 11월 15일, 심사위원들과 칸의 티에리 프레모, 로테르담의 사이먼 필드 집행위원장은 파라다이스호텔 지하 카페에서 밤새워 술을 마시며 우정을 다졌습니다. 다음 해 1월 말, 허우샤오시엔이 심사위원으로 초청된 로테르담에서 우리는 다시 모였습니다. 페스티벌 카페에서 매일 밤늦도록 술과 얘기를 나누다가 로테르담영화제의 상징인 호랑이와 제 이름의 虎(호랑이) 자를 따서 ‘타이거클럽’이 결성됐습니다.
제7회 부산영화제 심사위원이던 프랑스 여감독 클레어 드니, 홍상수 감독, 에드와르도 안틴 부에노스아이레스 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등도 매일 밤 포장마차에서 살았습니다. 결국 ‘부산’에 반한 드니 감독은 2년 후 영화 ‘틈입자(Intruder)’의 상당 부분을 부산에서 촬영했고 저는 카메오로 깜짝 출연했습니다. 이재용(‘정사’) 장률(‘이리’) 임권택(‘달빛 길어 올리기’) 감독과 함께 저를 배우로 데뷔(?) 시켜준 은인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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