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품은 신앙一家 (下) ‘거지 대장’ 전도사 윤치호] 공생원 83년… 4000 아이들 양육하다
지난달 17일 KTX를 타고 도착한 목포역에선 1930년대 히트곡 ‘목포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윤치호. 그가 살아있다면 올해로 102세다. 목포공생원(1928년∼현재)의 뿌리인 전도사 윤치호를 찾아 나선 길. 전남 목포시 죽교동, 유달산 아래 공생원에선 목포 앞바다가 내려다보였다.
윤치호 전도사의 외손녀 정애라(49)씨가 뛰어나왔다. 정씨는 2001년 7대 원장으로 부임했다. 2대부터 부인 윤학자, 장남 기, 사위 김창식(차녀 향미 남편), 장녀 청미, 친손녀 록(장남 윤기씨의 외동딸) 순이다. 강당에는 윤 전도사가 생전 고아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 옛날, 슬프도록 가난했던 시절에 어떻게 단체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까. “저도 참 신기하더라고요. 그 시절에 사진이 어딨어요. 그런데 외할아버지는 유달산 너머 그 먼 데서 사진사를 불러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단체 사진을 남기셨단 말이죠.” 1928년 10월 윤 전도사가 처음 ‘더불어 사는 곳’이란 뜻의 공생원 간판을 내걸었을 때, 원생이라곤 7명뿐이었다. 열아홉 젊은 나이에 거리를 배회하던 7명의 아이들을 데려다 키운 게 공생원의 시작이다. 2011년 현재 공생원엔 100여명의 아이들이 살고 있고, 그간 공생원을 거쳐 간 아이는 4000명에 육박한다. “살아 계시다면 크게 기뻐하시겠지요.”
나사렛 목공소의 목수
윤치호 전도사는 1909년 6월 13일 전남 함평군 대동면 상옥리 옥동부락에서 아버지 윤영대씨와 어머니 권채순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파평 윤씨 종손으로 태어났지만 집안은 소작으로 생계를 간신히 유지하는 빈농이었다. 어린 시절 학교 문턱도 밟지 못했다. 13세 때엔 아버지가 과로로 사망했다. 졸지에 소년가장이 된 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딱한 처지의 그를 미국인 여선교사 줄리아 마틴이 전도했는데, 그해가 1924년이다. 예수를 만난 그는 함평의 옥동예배당에 나갔고, 선교사와 전국 순회 노방전도를 하다 서울의 피어선성경학원에 입학한다. 아들 윤기(69·숭실공생복지재단 명예회장)씨에 따르면 달리는 차를 세우고 전도할 정도로 열성적인 크리스천이었다. 3년 뒤 전남 최초의 교회인 목포 양동교회 전도사로 부임한 그는 하나님 이외 다른 신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신사참배 반대 설교로 48차례나 구속되기도 했다.
윤 전도사는 그리고 목수였다. 그는 목포시 호남동 18번지에 허름한 초가를 지어 ‘나사렛 목공소’를 차렸다. 예수처럼 살겠다며 목수로 일했다. 그러면서 거리의 고아를 데려가 먹이고 재우다가 1년 만에 목공소를 정리했고, 고아에게 자립의 길을 열어준다며 엿 가게를 열었다.
일본여성과의 결혼
고아들 대신 동냥하던 ‘거지대장’ 윤치호가 사랑한 여성은 공교롭게도 일본인이었다. 공생원 아이들에게 음악과 일본어를 가르쳤던 자원봉사자 다우치 지즈코(한국명 윤학자). 지즈코씨는 정명여학교 음악교사로 1936년부터 자원봉사를 시작했었다. 그녀는 조선총독부 관리인 아버지를 따라 7세 때부터 목포에서 살아 말이 통했고,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정서가 통했다. 결혼에 이르기까지 반대는 엄청났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한다 했을 때 할머니는 식음을 전폐하고 일본여자를 파평 윤씨 집안의 며느리로 맞이하는 일만은 안 된다고 우셨답니다.” 아들 윤기씨가 전해들은 이야기다.
윤 전도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두가 형제자매라며 결혼을 강행했고, 1938년 10월 15일 목포공회당(현 목포상공회의소)에서 식을 올렸다. 일제치하 일본인 여성과의 결혼은 파격이었다.
사상의 경계에서
1950년 전쟁이 터졌다. 윤 전도사는 ‘고아를 두고 우리만 도망칠 수 없다’며 공생원을 지켰는데, 그게 시련의 단초였다. 목포에 진입한 인민군은 윤치호가 이승만 정권 아래 구장(區長)을 맡은 데다 부인이 일본인이라는 점을 들어 인민재판에 회부했다.
“윤치호 반동은 인민을 착취했고, 해방 후에는 이승만 괴뢰 정권에 가담하여 사회사업이라는 가면을 쓰고 인민이 피땀 흘려 모은 금전을 갈취한 악질 반동분자요. 게다가 그의 처 지즈코는 우리 민족의 철천지원수인 일본 사람이오. 그는 총살감이오. 반동이라 인정하는 동무는 손을 드시오.”
손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뿐더러 주민은 도리어 그의 편에 서 줬다.
“윤 동지는 이승만 정권 때 구장을 지냈습니다만, 실제로는 구장이라기보다 목포 시민들이 사랑하는 거지대장이었습니다. 오로지 불쌍한 고아들을 위해 애써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윤 동지의 부인은 일본인이긴 하지만 이 나라의 부모 없는 고아를 위해 헌신해온 고마운 분입니다. 특히 윤 동지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까지 독립운동을 위해 몸 바친 애국자입니다.” “옳소!” (윤기 저서 ‘어머니는 바보야’ 중에서)
인민군은 그러나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인민에게 봉사한다는 조건으로 대반동의 인민위원장직을 맡게 했고, 사무실까지 설치했다. 목숨은 부지했지만 3개월 뒤인 9월,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이번엔 인민군을 도운 이유로 국군에 붙잡혀 갔다. 주변 인사들이 구명운동을 해줘 1951년 1월 가까스로 석방됐지만 삶의 여정은 길지 않았다. 며칠 뒤 광주 전남도청에 원생을 위한 식량 구호 요청을 하겠다며 길을 나섰다가 소식이 끊긴 것. 그의 나이 마흔 둘이었다.
묘연한 행방
행방은 묘연했다. 아내 지즈코는 사방으로 남편의 행적을 수소문했다. 광주에 가면 늘 남편이 묵던 여관에 찾아갔다. 여관 주인 왈, 밤에 세 사람의 남자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남편이 머문 방엔 짐 보따리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 시대 여관은 사람이 들끓는 곳이었다. 방송국도 신문사도 없던 시절 여관은 정보의 핵심 창구였다. 하도 사람이 많이 들락거리니 개의치 않았던 주인도 며칠째 투숙객이 돌아오지 않으니 내심 불안한 터였다.
지즈코는 서울에도 갔다. 해방 직후 지즈코가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 영원히 이별한 줄 알고 둘째 처를 들였던 윤 전도사. 그 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윤 전도사는 자신의 아내였지만 일제치하에 수난을 겪은 한민족에게 증오의 대상 일본인이었기에 그녀를 피신시켜야 했다. 돌아오지 못할 거라 여겼다. 지즈코가 예상을 뒤엎고 돌아왔을 때 작은 처는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갔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려운 걸음을 했건만, 작은 처는 윤 전도사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작은 처는 대신 공생원 아이들 먹이는 데 보태라며 자신이 미8군 클럽에서 일해 번 돈을 그녀에게 내놨다.
윤 전도사의 행방과 관련해선 3가지 설이 있다. 첫째, 우익에 붙잡혀갔을 가능성. 아무리 그가 좋은 사회사업을 한다 해도 반공청년단 입장에선 인민위원장까지 지낸 그는 축출 대상이었을 것이란 예상이다.
둘째, 빨치산에 살해됐을 가능성. 인민위원장까지 시켜 놨는데 국군에 풀려난 걸 보니 수상하다며 괘씸죄를 적용했을 경우다. 낮에는 국군, 밤에는 빨치산이 활보하던 시절로 어쩔 수 없이 경계에 서 있던 윤 전도사의 운명은 어느 쪽으로든 순탄치 않았을 것이란 추측이다.
공생원을 탐낸 사람들이 해코지했다는 설도 있다. 전쟁이 나고 외국 원조가 시작되면서 사회사업에 돈이 몰릴 것이라 생각한 사람들이 납치했을 것이란 주장이다.
함께 산다는 것
공생. 윤치호 전도사의 삶은 공생의 삶이었다. 목판에 새긴 공생원이라는 세 글자는 윤 전도사가 꿈꾸는 유토피아였다.
그가 투옥돼 있던 어느 날의 이야기다. 공생원 아이들이 밥벌이를 위해 구두닦이로 나선 길에서 한 군인이 말을 건넸다. “너희들은 왜 구두를 닦니. 형제니.” “고아예요. 형제는 형젠데 피가 안 섞인 형제에요.” “뭐 그런 형제가 다 있어. 어디서 왔니.” “해변가에서요.” “해변가라면 혹시 공생원이냐.” “네. 저는 거기 살고 얘는 원장님 아들이에요.” 이 군인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경찰에 쫓겨 목포 해변 기슭에 피신했는데 그때 공생원장이 부상당한 자신을 숨겨준 일을 고마워하고 있었다. “결국 일경에 발각돼 붙잡혀 갔지만 너희들이 불러준 ‘봉선화’ 노래를 잊을 수 없구나.” 그는 윤 전도사가 투옥된 감방을 알려줬다. “너희들 아버지는 바로 이 안에 계시다.”
아이들은 구두 닦아 번 돈으로 호빵을 사 면회를 갔다. 그날 뼈마디가 앙상한 윤 전도사가 웃으면서 아이들에게 했던 말. “도로 가져가서 아이들과 나눠 먹어라.” 아이들이 들은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윤치호 전도사 연보
1909년 6월 13일 전남 함평군 대동면 상옥리 출생
1923년 부친 별세
1924년 미 여선교사 줄리아 마틴의 전도로 교회 출석 피어선 성경학원 입학
1928년 10월 목포시 호남동 18번지에 ‘공생원(共生園)’ 설립.
1937년 4월 대반동(죽교동)으로 공생원 이전
1938년 일본인 다우치 지즈코(윤학자)와 결혼
1940년 장녀 청미 출생
1942년 장남 윤기 출생
1947년 차녀 향미 출생
1949년 차남 영화 출생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인민재판에 회부 대반동 인민위원장직 맡음
1950년 9월 인민군 후퇴, 인민군 도운 혐의로 국군에 체포
1951년 1월 석방 후 광주로 떠났다가 행방불명
목포=글 이경선 기자·사진 이병주 기자 boky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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