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진 아이들 마음에 햇살 한줄기 비췄으면… 고교생 아들 친구 둘 보듬는 준영 엄마의 기도
그 집으로 가는 길은 평탄치 않았다. 29일 서울 후암동 용산고등학교 옆길, 어두컴컴한 길을 따라 올라갔다. 남산 아래 첫 마을 해방촌. 경사가 가파른 언덕길은 끝이 없었다. 한참을 올라가다 골목으로 몸을 돌리자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사람 하나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골목길. 계단을 조심스레 올랐다. 전봇대 위 깜빡거리는 주황색 가로등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3월의 밤바람이 아직 차가웠지만 이마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남산 서울타워가 눈앞에 펼쳐졌다. 집은 비좁고 초라했지만 그 집에서 보는 야경은 아름다웠다. 그곳에서 한 가족을 만났다. 준영, 재형, 경호(17·이상 가명) 그리고 임설자(47·여)씨. “오느라 너무 고생 많았죠?” 인사를 건네는 임씨의 얼굴이 밝았다.
그날 밤, 재형에게 무슨 일이….
눈을 의심했다. 2명이 살기에도 넓지 않은 방, 낡은 집기들, 갈라진 벽면. 집은 겨울철 칼바람과 여름철 무더위를 막아주지 못할 것 같았다.
“지붕이 양철판으로 돼 있는, 서울에서 몇 안 남은 집일 거예요.”
임씨가 양철판을 손으로 가리키며 살짝 웃었다. 얇은 양철판이 위태롭게 지붕을 덮고 있었다. 녹이 슬어 빗물이나 막아줄지 의문이었다. 유리창은 곳곳에 금이 가 있었다. 한 부모 가정, 기초생활수급자인 임씨의 형편을 집이 말해주고 있었다.
거실 겸 부엌 겸 방으로 쓰는 하나뿐인 공간에 네 사람이 둘러앉았다. 자기 이름을 얘기하는 아이들. 성(姓)이 제각각이다. 임씨의 아들은 준영이 뿐, 재형과 경호는 아니었다.
재형과 경호는 준영이의 친구들이다. 어려운 가정형편, 가정불화로 갈 곳 없는 그들을 임씨가 거두었다. 재형은 덩치가 크고 힘이 세 보였다. 누구도 섣불리 건드리지 못할, 그런 스타일의 친구다. 그런데 웃음이 참 밝았다. 그러나 그 녀석, 아픔이 참 많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집을 나간 뒤 소식이 끊겼다. 불행의 시작이었다. 홀로 남은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매질을 해댔다. 집에 들어가기가 죽기보다 싫었단다.
결국 중학교 때 사고를 치고 학교를 나왔다. 학적부의 빨간 줄, 어린 재형에겐 또 한번의 시련이었다. 선생님과 친구의 권유로 검정고시를 치러 가까스로 실업계 고교에 들어갔지만 아버지의 폭력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던 지난해 10월 어느 날, 마침내 사달이 나고 말았다. 잔뜩 취한 아버지가 말대답을 했다는 이유로 재형을 때리기 시작했다. 참다못한 재형이 때리던 아버지의 팔을 잡아채자 아버지는 신고 있던 군화로 아들의 발등을 내리 찍었다. 슬리퍼만 신고 있었을 뿐이던 재형은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사실 너무나 아팠던 건 다친 발이 아니라 찢어질 대로 찢어진 마음이었다. 절뚝거리며 집을 나섰다. ‘누구에게 전화를 할까.’ 휴대전화에 저장된 이름을 살펴보다 한 사람의 전화번호에 시선이 멈췄다. 준영이, 유일한 친구였다.
재형은 준영과 통화한 뒤 상황을 알게 된 임씨 손에 이끌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갈 곳 없는 재형이가 임씨 집에 묵게 된 건 그 날부터였다.
슬픈 눈을 가진 경호
비슷한 시기. 준영이가 오토바이 사고를 당했다. 학교수업이 끝난 뒤 준영이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경호에게 “지하철역까지만 데려다 줘”라고 부탁한 게 화근이었다. 짧은 거리였지만 오토바이가 넘어지면서 준영이의 발목 관절이 부러졌다.
경호는 미안했다. 자기 잘못으로 친구가 다쳤으니 말이다. 미안함과 더불어 또 한 가지의 걱정거리가 있었다. 돈이었다. 경호 수중엔 단 한 푼도 없었다.
경호는 부모의 이혼으로 아버지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말 한마디 없이 중국으로 가버렸다. 갑작스러웠다.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은 채 아들만 두고 사라진 거다. 한순간에 갈 곳이 없어지게 된 경호는 충격을 받았다. 동생과 함께 살고 있던 어머니를 찾았지만 문전박대를 당했다. 이후 아버지, 어머니… 아무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때부터 경호는 어쩔 수 없이 주유소에서 일을 하며 숙식을 해결했다.
이런 경호를 준영은 참 많이 걱정했다. 오토바이 사고 때도 오히려 경호를 위로했다. 오토바이 사고 이후 경호의 우울증세는 더 심해졌다. 준영은 혹시 친구가 극단적 선택을 할까 두려웠다. 결국 임씨와 준영이가 좁은, 그 집으로 경호를 데려왔다.
내 자식 같은 녀석들
임씨는 상처를 많이 받은, 힘든 삶을 살아왔노라고 털어놨다. 그래서 아프게, 힘들게 사는 사람이 요즘은 남 같지 않게 느껴진다고 했다.
그는 소녀가장으로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내야 했다. 사랑하는 동생을 연탄가스 중독으로 먼저 떠나보냈고, 또 다른 동생이 오랜 기간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가정생활도 순탄치 않아 이혼한 뒤 보험설계사 등을 하며 홀로 두 아들을 키웠다. 준영이의 형은 지방 소재 대학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 중이다.
신앙을 가지게 된 건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4년 전이에요.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제대로 키우고 길러야 하는지 걱정되고 불안해지기 시작했어요. 기댈 곳이 필요했다고 할까요.”
이전까지 그는 이혼의 피해자가 자신이라 생각하며 살았다고 했다. “가장 피해를 본 건 제가 아니라 아이들이었다는 걸 뒤늦게야 생각했어요. 미안함과 동시에 더 잘 키우고 싶다는 부담과 불안이 겹쳐왔죠.”
이즈음, 일 때문에 찾았던 서울 하월곡동 한성교회에서 그는 하나님을 만났다. 그에게 하나님의 첫 인상은 ‘족집게’였다. “목사님이 그 전 주 제가 했던 경험과 똑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시더군요. ‘원수도 사랑하라’는 말씀, 제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했어요. 그 다음 주에도 교회를 나갔습니다.”
마음이 평안했다.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게 해 달라’ ‘열심히, 성실히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아들 친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예전엔 남의 고통이 제 고통으로 와 닿지 않았어요. 제가 힘드니까 남한테 눈이 안 갔죠. 하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믿은 뒤, 다른 사람이 아픔을 이겨내도록 힘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집이 청소년 쉼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단다. 그런데 아이들이 오죽 갈 곳이 없으면 자신의 집에 와 잠을 청하고, 음식을 먹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재워주고 먹을 것 나눠 먹는 등 제가 하는 건 정말 작은 것에 불과하죠. 그런데 그만큼의 도움일지라도 고맙게 생각하는 아이들, 우리 모두가 더 큰 도움을 줘야 해요.”
사회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했다. 가정 문제로 경제적,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는 청소년들이 부모가 있다는 이유로 학비, 급식비 등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해 돈 벌며 학교 다니느라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라는 거다.
“앞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 나가는 아이들이잖아요.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는데, 한번 그랬다고 윽박지르고 구석으로 몰고, 무관심하면 과연 그 아이들이 어떻게 될까요. 그런 아이들에게 힘을 주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고 싶어요.”
그는 남산과 서울 시내의 야경이 바라다보이는 창문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아이들을 위해 조용히 기도했다. “준영이와 준영이 친구들 마음의 상처를 주께서 치유해 주세요. 그 착한 아이들이 어디서 무얼 하든 꼭 지켜주시고 힘을 주세요.”
■준영이 엄마 이야기는 그간 준영 엄마의 멘토가 되어준 ‘미아리서신’ 이미선 약사의 제보로 취재가 진행됐다. 이 약사는 “칼럼에 언급한 적이 있는 준영이 친구들을 도울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어왔다. ‘이웃’은 다각도로 검토 끝에 그들의 멘토인 이미선 약사를 통한 후원 방법을 모색했다(후원계좌 국민은행 842-21-0303-803 예금주 이미선).
글 조국현 기자·사진 서영희 기자 joj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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