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도정치·공안정국·언로차단… ‘조선 르네상스’ 몰락 불렀다
‘정조 사후 63년- 세도정치기의 국내외 정치 연구 ’
영·정조 시대(1724∼1800)를 흔히 ‘조선의 르네상스’라 부른다. 정조가 죽은 것은 1800년, 18세기의 마지막 해였다. 그 후엔 어땠던가. ‘홍경래의 난’이 1811년 발발한 뒤 크고 작은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 사대부 층의 역모가 아니라 백성들이 집단적으로 들고일어난 민란이었다. 세도가의 권력이 왕권을 능가했고, 가뭄과 기근이 잇따랐으며, 소위 ‘삼정의 문란’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아무리 정조의 뒤를 이은 순조·헌종이 무능했다 한들 이렇게 급속도로 조선이 쇠퇴한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성군이 죽자마자 이토록 모든 일이 엉망이 되는 게 가능할까.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리더십연구소 박현모 연구실장의 저서 ‘정조 사후 63년-세도정치기(1800∼1864)의 국내외 정치 연구’(창비)는 이 같은 의문에 답하는 연구서다.
◇어린 왕, 없어진 왕권=순조 1년 2월 9일자 ‘조선왕조실록’엔 상징적인 장면 하나가 등장한다. 노론 벽파는 선왕인 정조의 총신(총애 받는 신하)이자 영의정이었던 남인 채제공(1720∼99)에 대한 탄핵을 시도한다. 채제공은 정조 생전에도 반대파의 탄핵을 많이 받은 인물이었는데, 이 때문에 정조가 “상소에 ‘채제공’을 언급하지 말라”는 명을 내릴 정도였다. ‘채제공을 삭탈관직하라’는 요구를 받은 순조가 ‘채제공에 대한 상소는 언급하지 말라’는 정조의 명을 근거로 항변하자 승지들이 즉각 대꾸했다.
“무릇 대간의 계사(啓事·임금에게 아뢰는 말이나 글)에 속한 것은 일찍이 비답(批答·임금이 상주문의 말미에 적은 가부의 답)없이 이렇게 도로 내린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400년의 가법을 지키소서.”
이때 순조의 나이는 12세. 대왕대비였던 영조 계비 정순왕후는 수렴청정하는 4년 동안 정조의 총신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노론 벽파 독재체제를 구축함으로써 탕평책을 무위로 돌렸다. 천주교는 남인들을 쓸어내는 좋은 명분이었다. 박 연구실장은 “정조의 갑작스러운 사망 및 신유사옥 등 계속되는 ‘공안정국’을 겪으면서 조선 사회는 일종의 ‘자연상태’에 빠졌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수렴청정이 끝나자 순조의 장인인 노론 시파 계열의 김조순이 실권을 잡았다. 이른바 ‘안동김씨 60년 세도’의 서막을 연 인물이다. 국정최고기구인 비변사는 반남박씨(순조 생모 수빈 일가), 경주김씨(대왕대비 일가), 안동김씨 등 외척들이 번갈아가며 장악했다. 순조 치세 후반 대리청정을 맡은 효명세자가 일시적 반격을 가했지만, 그마저 요절하자 왕권은 다시 땅에 떨어졌다.
◇정조의 언로 탄압이 불씨 제공=34년 동안이나 재위한 순조가 무능했던 건 사실이다. 8세부터 23세까지 왕위에 머물렀던 헌종도 자기 뜻을 펼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정조가 구축했던 ‘시스템’의 책임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정조가 내린 ‘금령(禁令)’과 묵살한 탄핵상소 숫자를 분석해가며 이 시기 언로 탄압이 심각했었음에 주목한다.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탕평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제압하기 위해 언관(言官)을 무시했다. 언관들을 각 당파의 대리인쯤으로 인식했던 정조는 재위 후반기로 갈수록 언로를 억눌렀다는 것이다. 일을 추진할 때 신하들의 반대 상소가 많을 것 같으면 ‘금령’을 내렸다. 금령이란 ‘이 일에 대해서 언급 자체를 말라’는 것이다. 박 연구실장에 따르면 실록에 나타난 정조의 금령은 모두 163건인데, 즉위 원년엔 0건이었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많아져 재위 24년째에는 11건을 기록했다. 노론의 거두인 심환지는 “사람들이 입을 열고 의논하지 못하게 해서 국가 체모가 구차해지고 공론이 위축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 결과 조선왕조 특유의 활발한 공론정치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국학자 안확(1886∼1946)은 ‘조선문명사’(1923)에서 “정조 중엽에 이르러서는 영영 당의(黨議)가 끊어지고 침묵이 주를 이루매 소위 세도라 하는 것이 생기고 문벌로의 제약이 혹심하여 필경 국정이 크게 쇠퇴함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있다. 순조가 즉위할 무렵에는 이미 ‘권력독점 및 부패를 방지하고, 정책 아이디어와 새로운 인재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한 조선왕조의 공론정치체제가 형해(形骸)화된 상태’가 돼버린 것이다.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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