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주철기 (5) 프랑스 연수 2년간 매일같이 성경공부

Է:2011-03-06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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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주철기 (5) 프랑스 연수 2년간 매일같이 성경공부

초년 외교관 생활은 바쁘게 지나갔다. 1974년 해외 연수를 갈 때가 됐다. 당시 우리나라 사정이 좋지 않아 외국 정부 초청에 한해 해외 연수를 할 수 있었다. 나는 프랑스 정부의 장학생으로 선발돼 외교부 동료 이경우 강광원 사무관과 함께 파리로 떠났다. 그때 비행기를 처음 타봤다. 프랑스의 아름다운 환경과 그림 같은 건물, 특히 루브르 박물관은 경이로웠다.

국제행정대학원(지금의 ENA)에서는 2년간 재미있게 공부했다. 당시 한국은 국민소득 280달러 정도로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와 같은 수준이었고, 학교에서는 한국이 섬유 등 경공업을 일으키려고 애쓰는 나라 정도로 가르쳤다.

그때는 공무원이나 교포 모두 어려웠다. 당시 재불 한국인은 프랑스 전역에 400여명뿐이었다. 한국식당도 겨우 하나 정도 있었고 한인 교회는 아예 없었다. 연수 떠나기 이전에 나는 직장 친구의 소개로 대학생 성경공부 모임인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에 나갔다. 파리에 갈 때도 UBF의 기도 후원을 받고 떠났다. 기숙사에서 매일 성경공부를 하며 같이 간 친구들에게 성경공부를 하자고 조르곤 했다.

불경 테이프를 즐겨 듣던 친구는 “와이라노, 이거. 내가 이곳에 공부하러 왔지, 성경 배우러 왔나” 하며 신경질을 냈다. 그랬던 친구가 지금은 그리스도의 좋은 제자가 되어 기도의 동역자로 전도에 힘쓰고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파리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나는 프랑스의 압도적인 문화에 흡수돼갔다. 프랑스에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과 예술 작품이 가득했다. 나는 한마디로 인본주의의 극치를 맛보고 있었다. 프랑스는 동시에 20세기 초반 종교와 정치의 분리 이후 극심한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었다. 나 또한 그 세속화에 편승, 하나님 말씀에서 멀어지며 파리가 주는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 무렵 UBF와의 관계도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한국인 유학생들은 모두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 연수원 대우도 좋아졌는데 아프리카 방문차 파리를 경유하다가 외교관 연수생들의 초라한 생활을 전해들은 당시 김동조 외무장관의 지시로 환경이 나아졌기 때문이다. 그 이후부터 외국 정부의 장학금이 아닌 한국 정부의 자금으로 연수생들을 보냈다. 대한항공이 파리에 취항을 시작할 무렵 나는 파리를 떠날 때가 다가왔다. 프랑스어도 많이 늘었고 유럽 학생들과 비교하면서 실력 면에 자신이 있다고 느꼈다. 별도로 파리1대학에서 역사 공부도 하면서 아프리카 등 여러 나라 외교관들과 사귀기도 했다.

귀국한 때는 76년 봄으로 나는 곧바로 아프리카 관련 업무를 시작했다. 그 무렵 친지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앳되고 순수하고 매력적인 모습이 마음에 들었고 그날부터 매일 만나며 서로를 알아 갔다. 아내는 처음에 내가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이야기할수록 당당하고 성실한 모습이 좋아졌다고 한다.

나는 만난 지 두 달 만에 결혼하자고 했다. 외교관들은 보통 짧은 만남을 통해 결혼하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모험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인연임을 확신하게 됐다. 그렇게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안 돼 북아프리카 튀니지 3등 서기관으로 발령이 났다. 프랑스로 다시 가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76년 8월 튀니지의 튀니스 공항에 도착했다. 아프리카 최북단이었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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