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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풍향계-서홍관] 담배소송과 사법부의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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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2월 배금자 변호사를 필두로 한 변호인단은 폐암 환자와 그 가족들로 구성된 흡연 피해자 31명을 대리해 담배회사 KT&G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3억7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시작했다. 2007년 1심 재판부는 담배가 폐암의 원인이지만 이것은 다수를 대상으로 한 역학적 인과관계에 불과하고 한 개인에서 흡연이 폐암의 원인이라는 것을 확증할 수 없기 때문에 배상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지난 15일 2심 재판부는 폐암과 흡연의 인과관계는 인정되지만 KT&G의 불법행위는 인정되지 않는다고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지금까지는 흡연과 질병 간 인과관계 자체가 인정이 안 돼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진일보한 판결이다. 하지만 흡연으로 인한 폐암 발생을 인정하면서도 그로 인한 배상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마치 살인을 인정하면서 살인 책임을 묻지 않는 것처럼 책임을 회피한 판결이다.

언제까지 KT&G 편드나

담당 판사는 기자회견에서 담배회사의 책임을 일일이 물으면 담배회사가 파산할 것 같아 솔로몬의 지혜를 찾기 위해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다고 밝혔다. 진실을 가리는 문제에 앞서 담배회사의 존립과 같은 사회적 파장을 걱정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재판부는 담배회사에 대한 걱정보다도 담배를 피다가 폐암에 걸린 억울한 피해자나 그 가족들부터 생각했어야 했다. 여기서 담배회사의 불법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담배회사의 불법성은 담배의 해로움을 알면서도 고의로 숨겼거나, 첨가물을 넣어서 니코틴 중독을 유도하거나 제품을 더 해롭게 하는 행위 등을 말한다.

이들 흡연 피해자는 모두 1957년에서 70년에 흡연을 시작한 사람들로서 당시에는 어디에서도 담배가 해롭다는 경고를 듣지 못했을 뿐 아니라 군대에서도 무료로 담배를 줘 흡연자가 됐다. 더구나 처음 담뱃갑에 ‘건강을 위하여 지나친 흡연을 삼갑시다’라는 경고문이 실린 해는 76년이다. 이것은 금연하라는 말이 아니고 알맞게 흡연하라는 메시지였다. 그나마 흡연이 폐암의 원인이라고 적힌 경고문구가 나온 89년에는 이미 흡연력이 수십년 지나 니코틴에 중독된 상태라 금연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50년대부터 담배의 해로움을 알았던 담배회사들이 흡연자들에게 담배의 해로움을 숨겨온 것은 그들의 문건을 통해서도 이미 드러난 셈이다.

미국에서는 담배소송 과정에서 담배회사들이 담배의 니코틴 중독성을 높이기 위해 각종 첨가물을 투입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KT&G 역시 외국 담배회사들처럼 온갖 첨가제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KT&G는 재판부 요청에 의해 첨가물 목록을 제시했는데 미국에 수출하는 담배 제조에 쓰이는 첨가물 242가지 이름만 공개하고 나머지는 영업비밀이라고 주장하면서 함구하고 있다. 공주대 신호상 교수는 우리나라 담배에서 그들이 공개한 것 이외의 물질들이 있음을 확인했다.

담배 첨가물 성분 공개해야

미국은 또 94년 정부의 명령에 의해 담배의 모든 첨가물 목록을 공개하고 있다. 식품을 사면 과자 하나에도 지방이 얼마고, 단백질이 얼마며, 비타민이 얼마나 들어있는지 성분과 함량을 표시한다. 심지어 쇠고기를 사더라도 원산지 표기를 한다. 그것은 국민의 알권리 차원에서 공개하는 것이다.

사법부는 담배회사가 주장하는 ‘영업비밀’을 인정하고 있다. 이는 범인에게 제출할 자료를 선택하도록 하면서 수사를 진행하는 꼴이다. 매년 국민 5만명 이상을 죽음으로 내모는 담배 첨가물에 대해 공개를 강제하지 않는 것은 담배회사의 증거은닉에 대한민국 정부가 동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법부는 언제까지 그들의 영업비밀을 보호하면서 흡연 피해자들에게 모든 것을 입증하도록 강요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서홍관 한국금연운동협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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