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이화련] 남편의 자기소개서
남편이 쓴 자기소개서를 보았다. 일부러 본 건 아니었다. 컴퓨터에서 다른 걸 찾는데 그게 눈에 띄었다. 남편도 내게 보여 줄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 틈틈이 고쳐 쓰며 공들이는 눈치였는데, 몇 달 전 퇴임사를 썼을 때는 한번 보라더니 이번에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소개서는 취업용이었다. 그가 재취업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작년 여름에 퇴직한 뒤 보조직원으로 연말까지 더 근무했다. 남편의 직장은 같은 직종의 다른 곳에 비해 정년이 이른 편이라 아쉬웠지만 무사히 정년을 맞은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30년 동안 식구들 먹여 살리느라 고생했다고, 이제 쉬어도 된다고 남편을 치하했다. 아내로서 진심이었다. 연금으로 살려면 빠듯하겠지만 곧 적응하게 될 거라고, 안 되면 내가 포장마차라도 하겠다고 큰소리쳤다. 허풍이 섞였지만 역시 진심이었다.
그런데 그는 결국 이력서를 준비하고 자기소개서를 썼다. 일손을 아주 놓기에 55세라는 나이가 너무 이르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사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젊은이들도 취업이 쉽지 않은 요즘에 한물넘은 퇴직자가 아무리 자기소개서를 공들여 쓴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게다가 그의 소개서는 내용이 밋밋했다. 평범한 학력에 평범한 경력, 그다지 내세울 것 없는 가족 소개가 담겨 있었다. 가족끼리 화목하고 모두 건강하다고 썼다.
취업용인 만큼 예전 직장에서의 업무 경험과 사례를 들어 자신의 능력을 피력했지만 그 부분에 특별히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았다. 같이 산 사람이 보기에 좀 부풀려도 될 대목마저 덤덤히 넘어갔다. 문장이 매끄럽지 않는 데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토씨 하나 손댈 수 없었다. 그 멋없는 글을 읽고 나니 왠지 목이 잠겼다. 얼마 전 직장을 구한 아들이 쓴 자기소개서를 읽었을 때와는 달랐다. 아들도 몇 번인가 자기소개서를 썼다. 조용한 성격이라 적극성이 부족하지 않나 걱정했는데 글을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그저 틀에 맞춘 글이었지만 곳곳에 젊은이다운 패기가 엿보였다. 그렇게 서툴게나마 꿈과 책임감을 강조한 아들의 글은 나를 잠시 웃음 짓게 했지만 가장의 고단함을 행간에 감춘 남편의 글은 나를 숙연하게 했다.
중년의 가장이 쓴 자기소개서는 시들지 않는 열정이다. 더 많이 이루려는 욕심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기 위한 용기다. 지나간 삶의 성실한 기록이며 남은 날들에 대한 희망이다. 거기에는 두 번째 출발을 향한 진지함과 설렘이 담겨 있다. 가족에 대한 변함없는 헌신이 담겨 있다.
남편이 쓴 자기소개서는 다행히 헛되지 않았다.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다시 직장을 잡았다. 서류를 보내고 면접을 보는 동안 그의 표정은 청년 같았다. 합격 소식을 듣고는 새내기처럼 얼굴을 붉혔다. 나도 기뻤다. 그의 소개서가 받아들여지고 그것으로 그의 지난 삶이 인정을 받은 것 같아 흐뭇했다.
이화련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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