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연휴 성곽으로 시간여행… 역사의 비탈서 조선을 만나다

Է:2011-01-31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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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연휴 성곽으로 시간여행… 역사의 비탈서 조선을 만나다

조선 정조 때의 학자 유득공(1749∼1807)은 ‘도성을 한 바퀴 돌면서 안팎의 풍경을 구경하는 멋있는 놀이’를 순성(巡城)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성곽이 훼손돼 이제는 순성이라는 단어조차 낯설게 되었다. 최근 수원 화성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계기로 지자체들이 앞다퉈 성곽을 복원하고 있다. 올해는 설 연휴가 예년보다 긴만큼 시간을 내 성곽이 온전하게 보존·복원된 도시로 순성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정조대왕 꿈 - 수원 화성

정조대왕의 꿈이 서린 수원 화성은 ‘조선판 뉴딜정책’의 결과물이다. 조선시대 최대의 국책사업이자 신도시인 화성 축성에 투입된 인력은 37만명. 거대한 돌을 나르기 위해 다산 정약용이 개발한 거중기까지 동원됐던 화성은 건축실명제가 실시된 세계 최초의 성으로 설계도인 ‘화성성역의궤’가 전해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화성에는 성곽을 따라 장안문, 팔달문, 화서문, 창룡문이 있고, 각 문 사이에는 적정을 관찰하고 포를 쏘는 공심돈, 군사를 훈련시키는 장대 등 모두 41개의 시설물이 웅장하면서도 수려한 자태를 자랑한다. 서문인 화서문과 7개의 수문을 둔 화홍문, 호수에 비친 방화수류정,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회갑연을 열었던 화성행궁의 건축술이 뛰어나다.

왕도의 방패 - 공주 공산성

백제의 공산성은 무령왕의 아들인 성왕이 538년 부여 사비성으로 천도할 때까지 64년 동안 왕도를 지킨 천혜의 요새. 해발 110m의 야산에 위치한 공산성은 원래 토성이었으나 조선 인조 때 석성으로 개축됐다. 성에는 공북루 등 4개의 성문과 임류각 등 7개의 누각, 그리고 옛 왕궁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터가 남아 백제의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웅진성 수문병 근무 교대식이 거행되는 금서루는 1500여년 전 백제시대로 돌아가는 ‘시간의 문’이다. 둘레가 2.7㎞인 성곽은 부드러운 흙길인데다 적당한 굴곡과 높낮이로 인해 산책하기에 좋다. 아담한 공주 시가지와 유유히 흐르는 금강, 그리고 계룡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북서쪽 전망대에 서면 무령왕릉으로 유명한 송산리 고분군과 정지산, 곰나루, 여미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시간이 멈춘 - 낙안읍성

순천의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시간이 정지된 마을이다. 동문과 서문을 연결하는 대로 북쪽엔 동헌과 고을 수령의 숙소인 내아, 손님을 맞던 객사 등이 위치하고 있다. 대로 남쪽은 초가집, 대장간, 장터, 서당, 우물, 연자방앗간, 텃밭 등 민초들의 삶의 터전이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 미로처럼 이어진다. 1.4㎞ 길이의 견고한 석성에 둘러싸인 낙안읍성은 원래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토성이었다. 그러나 낙안군수로 부임한 임경업 장군이 1626년에 석성으로 개축했다. 100여 가구가 살고 있는 낙안읍성 민속마을의 초가집들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돌담이나 흙담에 둘러싸인 집은 가구당 2∼3채의 초가와 마당, 텃밭으로 이루어졌다. 낙안읍성의 명물은 초가집을 에두른 나지막한 돌담길. 주민들과 함께 짚물공예, 삼베짜기 등 체험도 가능하다. 갈대밭으로 유명한 순천만에는 요즘 흑두루미 등 철새들이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임진란 성지 - 동래읍성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을 포위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전즉전의 부전즉가아도(戰則戰矣 不戰則假我道)’란 글을 써서 읍성 앞에 내걸었다. 본격적인 공격에 앞서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거든 길을 빌려 달라”는 협박이자 선전포고였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기다렸다는 듯 ‘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이라는 글을 나무판에 써서 적진으로 던졌다. “싸워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는 명언을 남긴 송상현은 왜적에 대항해 싸우다 순절했다. 임진왜란 첫 격전지였던 동래읍성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대부분 철거됐으나 산등성이에 성의 일부가 원형 그대로 남아 현재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동래읍성은 동장대가 있는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서장대가 있는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현재 동래 시가지 중심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역에 축성된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

논개의 충절 - 진주성

진주성에는 임진왜란 때 왜군에 맞서 싸우다 의로운 죽음을 맞은 이들의 넋이 서려있다. 진주목사였던 김시민 장군이 3800명의 군사로 3만 왜군을 물리치자 왜군은 이듬해 10만 대군으로 보복공격을 감행했다. 진주성에 갇힌 7만 민·관·군은 왜군을 맞아 11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순국했다. 이 때 논개가 적장을 안고 의암에서 남강으로 투신했다. 둘레가 1.7㎞인 진주성은 시내 중심에 위치한 데다 남강을 끼고 있어 풍경이 수려하다. 진주성에는 촉석루를 비롯해 임진왜란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진주국립박물관이 있다. 촉석루 아래에는 강변 산책로도 조성되어 있고, 공북문과 서문 사이의 인사동 골동품거리에는 볼거리가 많다.

최후의 보루 - 남한산성

청나라 10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1636년 12월 14일(음력) 밤.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조선 조정은 성문을 꼭꼭 걸어 잠근다. 그리고 이듬해 1월 30일에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서문을 나와 삼전도 앞 들판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수모를 당한다. 47일 동안 생(生)과 사(死)가 뒤엉켜 싸웠던 남한산성은 위기 때마다 국방의 보루 역할을 한 역사의 현장이다. 산이 울창하고 계곡이 아름다워 사철 산행객들로 붐비는 남한산성은 신라의 주장성을 기초로 축성된 ‘천작지성(天作之城)’. 해발 500m를 넘나드는 험준한 지형을 따라 8㎞가 넘는 성벽이 둘러싸 대군으로도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요새이다.

글·사진=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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