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자연-일본 치산치수 영웅에게 길을 묻다] (下) 42년 망치 하나로 강을 바꾸다-스토우 야헤에
‘자연을 상대로 나쁜 일을 도모하여 해가 되면 그것이 재앙이다’
4대강 개발 사업에 8개 교단 협의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사업 중단을 촉구한 반면 보수 성향의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고질적 물 문제 해결과 지역 활성화”를 이유로 지지 입장을 밝혔다. 이에 따라 국민일보 ‘이웃’은 17∼18세기 일본 치산·치수 영웅 세 사람의 개발 사례를 통해 케이스 스터디(Case study)를 해봤다.
인력만으로 대자연의 흐름을 바꾼 역사(役事)는 200∼300년이 지난 지금도 생태의 순환을 반복하며 그 공과를 후대가 안으며 살고 있다.
“인간은 지혜를 이용하여 대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자연을 상대로 나쁜 일을 도모하여 해가 되면 그것이 재앙이다.”
스토우 야헤에(1651∼1752). 42년 동안 망치와 끌만으로 산을 절개해 강의 흐름을 바꿔 홍수 피해로부터 농민을 구한 일본 마쓰에번의 관리. 그는 1705년 1월 어느 날 치수공사를 앞두고 아들 간로쿠를 불러 이같이 말한다. 에도시대 세습 면장(面長) 가문에 지나지 않은 낮은 벼슬살이를 했던 그는 조부가 실패했던 역사에 뛰어든 것이다. 50대 중반의 그는 아들에게 산을 옮겨 강줄기를 바꾸겠다는 무모한 꿈을 얘기했다.
아들은 정령숭배를 하는 마을 사람들의 지탄이 두려웠다. ‘거북이 목’ 산세(쓰루기산)에 깃든 용신을 두려워 않는 아버지가 적이 염려됐다. 야헤에는 거북이 머리 앞으로 휘감아 도는 물줄기를 직선화하겠다는 의지였다. 그러자면 목 부분을 절개해야 한다. 머리 부분에 자리잡은 신사의 반대는 불 보듯 뻔했다.
지난달 23일 마쓰에시 히요시마을 기리도오시(산 등을 깎아낸 도로나 수로) 앞. 아름다운 계곡 하나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수영이나 낚시 또는 래프팅을 해도 좋을 빼어난 계곡이었다.
한데 이 ‘기리도오시’는 치산·치수를 위해 개발자가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개발 철학의 유산이 깃든 곳이다. 스토우야헤에기념사업회 이시하라 시게루(82)의 얘기.
“그는 마을의 호농(豪農)이었습니다. 세도가는 아니었어도 지방 말단 공직자로 편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었지요. 그렇지만 그의 가슴속엔 장마나 태풍만 왔다 하면 집과 농토가 휩쓸리는 농민 현실을 어떻게든 극복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어요. 끌과 망치로 산을 뚫고 말겠다는 생각을 누가 할 수 있었겠어요. 그는 농민을 위해 가족과 재산을 모두 바친 사람입니다.”
야헤에가 태어난 곳은 앞서의 시치베에, 다헤에와 달리 산촌 마을에 가깝다. 험준한 산세 사이로 형성된 논, 밭을 부쳐 먹는 마을이 이우강을 중심으로 듬성듬성하니 70여곳에 달했다. 이우강은 덴구산에서 발원이 돼 나카우미(中海)로 흘러드는 20㎞ 길이다.
그런데 이 강줄기는 히요시마을 쓰루기산에 이르면 산 암벽에 막혀 ‘⊃’모양으로 흘러 돌았다. 평상시에는 각 지천의 물을 끌어안으며 마을마다 풍부한 농수를 공급하는 젖줄 역할을 했다.
1702년 8월 이즈모 지방에 태풍이 닥쳤다. 순식간에 강물은 불었고 강 하구에 만조까지 겹치면서 히요시마을 일원 제방이 힘없이 무너졌다. 무엇보다 쓰루기산으로 인해 물의 흐름이 병목 현상이 되어 빠져 나갈 곳을 잃은 것이 원인이었다. 수백명이 죽고 집 4000채가 유실됐다. 논은 모래와 진흙으로 뒤덮였다. 이듬해에도 마찬가지였다. 야헤에는 이때를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는 지옥의 몰골’이라고 했다. 마쓰에번은 구휼미를 보냈으나 턱없이 모자랐다. 면장이었던 야헤에는 이 대홍수를 겪으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치산·치수를 하겠다고 결심한다.
그의 이러한 결심은 뿌리가 있었다. 1650년대 그의 조부 스토우 야헤에 이에마사가 면장을 할 때도 4번이나 홍수가 닥쳐 마을이 황폐화됐었다. 이때 이에마사는 이우강의 물줄기를 바꾸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믿었다.
소설 ‘스토우 야헤에’의 저자 고우에키바 오사무는 “그의 조부는 마을 회의를 소집해 ‘히요시수로공사’를 청원했다는 기록이 있다”며 “1650년 번의 지원을 받은 이에마사는 3년간에 걸쳐 토목공사를 시작한다”고 말했다.
쓰루기산 거북이 목은 이때 1차 절개가 됐었다. 높이와 폭 각 12.7m, 길이 29m에 이르는 난공사였다. 이즈모반도 대개 현무암층이 많으나 쓰루기산은 단단한 화강암이어서 번의 대규모 지원에도 3년이나 걸렸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1654년 홍수로 직선화한 제방은 눈 깜짝할 사이에 무너졌다. 12.7m의 좁은 폭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농토가 2.5배나 늘어났다고 기뻐했던 농민은 용신의 재앙이라며 동요했다. 이후에도 세 차례에 걸쳐 홍수가 덮쳤다. 호구지책 때문에 마을 처녀들이 팔려갔다. 게다가 토목공사를 지원하던 막강한 영주 마츠다이라 나오마사(도쿠가와 이에야스 손자)마저 죽었다.
야헤에는 조부가 남긴 수로공사 계획서만으로 부족하다고 보고 직접 제방공사 경험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오사카 야마토강 대토목공사가 있는 것을 알고 마쓰에 지방 파견 인력에 합류해 오사카로 떠났다. 1704년의 일이었다.
그는 거기서 8개월에 걸쳐 토목기술을 상세히 익힌 뒤 번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재정이 비약했던 번은 거절했다.
“여기가 야헤에의 집터입니다. 그는 1706년 재산을 털어 공사를 시작합니다. 10년이 걸릴지 30년이 걸릴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지요. 마을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공사라고 이미 등을 돌렸고요. 돈을 주며 공사에 참여하라고 해도 저주가 있을 거라고 외면했습니다.”
야마토 겐(인간자연과학연구소 이사·시민운동가)은 야헤에의 집념이 태산을 움직였다고 했다. 야헤에는 면민이 외면한 가운데 타지인 20여명과 함께 공사를 시작했다. 조부가 뚫은 절개암을 넓히고, 제방을 뚫는 공사였다.
그는 제방공사를 위해 창고의 쌀을 모두 처분, 임금으로 썼다. 그러나 타지 인부들도 제방 축조 공사가 아닌 바위를 깨서 수로를 만드는 일엔 동참하지 않았다. 용신의 노여움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야헤에는 별 수 없이 혼자 비계 위에 올라 망치와 끌만으로 화강암을 부수었다. 눈과 비가 와도 망치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기를 3년. 정성에 감복한 히요시마을 사람들이 그의 작업을 돕기 시작했다. 마침 번 관계자도 실태를 파악하고 격려금을 내놓자 공사에 탄력이 붙었다. 그리고 착공한 지 5년, 그동안 방치됐던 2차 수로공사가 완료됐다.
그런데도 야헤에의 망치질은 멈추지 않았다. 폭 6m, 깊이 1m는 더 깨내야 대홍수로부터 안전하다고 판단해서다. 모든 농민이 돌아갔어도 그는 외로이 비계 위에서 돌을 쪼았다.
한데 비극이 닥쳤다. 시집도 가지 않은 딸이 지병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사람들은 용신의 재앙이라고 다시 수군댔다. 계속되는 입방아를 떨치기 위해 62세에 종교계에 입문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어느덧 10여년이 또 흘렀다. 그간 큰 비가 없어서 마을은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적당히 하길 권했으나 듣지 않았다. 어느 날 아버지를 돕겠다고 바위를 깨던 아들 간로쿠가 피를 쏟으며 돌연사하고 만다. 상심한 아내마저 같은 해 몸져누워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또 3년 뒤 작은 아들 헤이자에몽도 급사했다. 대가 끊어지게 된 것이다. 정말 용신의 재앙 같았다.
그런데도 백발노인의 망치질은 계속됐다. 그리고 마침내 1747년 공사가 완료됐다. 그의 나이 97세였다. 바닷속 강을 파는 것과 같은 불가능한 일이 40여년의 망치질 끝에 이뤄졌다. 가족을 잃고, 재산을 헌납하고, 인생을 바친 대역사였다. 농민에게 대자연과 더불어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제방에 난 작은 구멍을 손을 넣어 막았다는 네덜란드 소년 영웅 한스 브링커의 노년판 같다.
지난달 26일 오후 관계자들은 취재진을 기리도오시와 좀 떨어진 한 밭으로 안내했다. 밭에 한국산 배추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 옆으로 둔덕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1650년 야헤에의 조부가 번의 지원을 받아 축조한 제방의 일부가 토목 유산이 돼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 마쓰에시역사자료관 정비실 관계자에 따르면 “현존하는 제방 유적은 폭 10m, 높이 3m, 길이 50m로 작은 돌로 쌓은 것”이라고 밝혔다.
야헤에는 102세까지 장수했다. 그의 유택과 집터 등은 개착지 2∼3㎞ 범위 내에 위치해 유적지로서 후대에게 산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때론 모세와 같은 지도력을 발휘하고 때론 주민과 갈등도 하며 하늘을 원망했던 야헤에. 자연과 맞선 그의 희생은 지금껏 백성에게 풍요를 가져다주고 있다.
에필로그
일본 치산·치수 영웅 3인에게 공통점이 있다. 첫째 이웃을 위한 개발 정신, 둘째 자기희생, 셋째 개발 이익을 탐하지 않은 것, 넷째 자연 경외, 다섯째 사회적 합의였다. 당시 창조세계의 보전과 같은 생명신학 관점의 인식은 없었다.
현대의 토목기술은 42년의 망치질로 극복하던 자연을 단 하루 만에 포클레인을 동원해 무너뜨릴 수 있다. 현대인에게 자연은 경외의 대상이 아니라 생활의 편리나 건설 이익에 따라 언제든지 주무를 수 있다는 정복적 자연관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크리스천에게 땅은 생명을 잉태하는 ‘어머니’다. 따라서 이를 학대하는 행위는 창조 질서에 대한 도전이다. 아마도 지구온난화로 지칭되는 재앙은 도전에 대한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우리의 4대강 개발 사업 판단 여부는 정확히 얘기하자면 전문가들의 몫이다. 지천도 아닌 모강(母江)을 다스리는 데 따른 환경공학적 결과, 사회적 가치를 일반인은 쉽게 알 수도, 판단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만금 간척지 개발 19년을 통해 알 수 있듯 개발론자와 반대론자가 밀고 당기며 선순환적 결과를 낳았다. 사회적 합의가 녹아들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결과는 아직 모른다. 일본 운하사례처럼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고 반면 치수와 간척 같은 긍정적 효과를 가져 올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치열한 논쟁이 묻힌 채 빠르게만 진행되는 4대강 개발 사업은 개신교의 판단처럼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시간을 두고 특정 강만 우선 개발해 생태질서를 관찰하는 케이스 스터디가 필요하다. 성서적 관점에서 볼 때 생태계 전체가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즈모(일본)=글 전정희 기자·사진 윤여홍 선임기자 jhjeon@kmib.co.kr
취재 지원 : 일본 재단법인 인간자연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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