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수지 (11) 결혼하기 위해 美 유학 중단하고 귀국
나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이대부속병원에서 정식 간호사 일을 시작했다. 김인수씨는 여전히 체신부 말단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말레이시아 대사관에서 행정직원을 뽑는데 ‘대학 졸업자’라는 자격 제한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죠이클럽’에서 갈고 닦은 영어 실력으로 200대 1의 경쟁을 뚫고 행정직 과장으로 합격했다. 그 후 극동방송국에 견습 PD로 취직했다가 외국 대사관에서 일한 경력을 인정받아 7개월 만에 총무과장, 입사 3년 만에 부사장에 올라 경영을 책임지기도 했다.
1965년 나는 교환간호사로 미국에 건너가 병원에서 일을 하면서 대학원 석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 역시 한미재단의 장학생으로 선발돼 이듬해 미국으로 갈 수 있었다. 우리는 함께 유학을 가기로 하고 내가 먼저 미국으로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이는 안암 진단을 받은 어머니가 생전에 아들의 결혼식을 보고 싶어 하신다며 빨리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어머니 건강도 문제지만 사실은 미국행 승선요금 360달러 중 160달러를 구하지 못해 유학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당시 나는 “약속대로 나와 결혼하려면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했으면 좋겠다”는 그의 편지를 받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장학금을 받고 이제 막 시작한 공부라 더욱 미련이 컸다. 저녁에 그의 편지를 읽으며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가도 아침이 되면 다시 생각이 바뀌었다.
‘아냐, 이대로 돌아가면 안돼. 하나님이 주신 좋은 기회인데 계속 공부해야지.’
고민 끝에 김활란 선생님께 조언을 구했다.
“내가 수지라면 귀국해서 결혼을 하겠다. 공부는 나중에도 할 수 있지만 결혼에는 때가 있고, 더구나 부모님은 기회를 놓치면 섬길 수 없기 때문이야.”
66년 3월, 결국 나는 미국에서의 공부를 중단하고 1년간의 교환간호사 계약 기간이 끝나자마자 한국으로 향했다.
가족은 물론 친구들까지 결혼식을 말렸다. 미국 유학생인 내가 고졸 남편과 결혼한다는 것이 주변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너, 정신 나갔니?”
특히 아버지가 가장 화를 내며 반대하셨다. 대학 때부터 남편을 좋아하지 않았던 아버지는 내가 미국에 유학을 간다고 했을 때 적극 찬성하셨다. 미국에 가면 자연히 헤어질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헤어지기는커녕 공부까지 중단하고 돌아와서 결혼하겠다고 하니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내가 귀국하자마자 서울 법대 졸업생을 준비시켜 놓고 선을 보라고 성화였다.
그러나 누구도 우리의 결혼을 막지 못했다. 우리는 그해 5월 14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장은 내가 다니던 동신교회였다. 남편은 단벌 양복을 세탁해서 입고 시내버스를 타고는 결혼식장으로 오다가 공교롭게도 버스 안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그때까지도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아버지는 버스에서도 눈길 한번 마주치지 않았다고 한다. 남편이 아버지의 버스 요금을 대신 내려고 하자 아버지는 손을 밀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네 것이나 내!”
신랑이 밉기만 했던 아버지는 결혼식장에 입장할 때도 나를 맞이하기 위해 내민 신랑의 손 위에 내 손을 거칠게 휙 내던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객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식장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정리=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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