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회고록] 속초 아바이마을 김민옥할머니

Է:2010-12-15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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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회고록] 속초 아바이마을 김민옥할머니

“저 통일전망대 너머가 우리 고향이여… 보고싶으나 마나”

강원도 속초시 조양동의 김민옥(84) 할머니. 할머니의 고향은 강원도 고성군 수동이다. 그곳은 같은 강원도지만 삼팔선 이북이다. 고성 통일전망대에선 할머니 고향이 보인다고 했다. 친정 부모가 살아 계시다면 백수를 넘기셨을 터. 소식은 알 수 없다. 김 할머니의 인생은 골짜기처럼 굽이졌다. 기관사였던 남편은 한국전쟁이 터진 첫날 포격에 맞아 숨졌다. 시아버지를 따라 피란에 나서면서 부모 형제와는 생이별을 해야 했다. 남쪽 땅에서 재취로 들어갔지만 술에 찌든 남편은 생계를 내팽개쳤다. 할머니는 삯바느질로 7남매를 키웠다. 오로지 자식들 위해 앞으로 달려왔건만 둘째 아들을 허망하게 잃어버리기도 했다. 20여년 절에 다니다 개종해 20여년을 교회에 다니고 있는 김 할머니. 할머니는 교회에 나가면서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육이오 사변’ 첫 날 포격에 숨진 남편

고성군 수동면 하탄이라는 데가 고향이요. 산골이라. 요 건봉사 올라가면 고 너매라<너머라>. 아니 보이는 지 몰 아니<몰라> 올라갔는데 고 너매라 하더구만. 여기선 안 보이는데. 가보지도 못하고. 내가 어릴 때 열여덟 살 먹을 때 일본에서 공출을 했어. 내가 공출허까<되니까> 우리 아버지가 시집을 보냈다고. 일본 안 보낼라고.

그래서 고성군 외금강면 사평리라는 데로 시집을 보냈어. 신랑이 철도국 댕기는데 거기 시즙(시집)을 해 가지고 거가 좀 살다가 철도간사<철도원 사택>로 살러 나왔지. 그러고 살다가 신랑이 육이오 사변 나면서 이 차<기차> 가지고 그때 고성에서 원산가고 고성에서 양양 백에<밖에> 못 가거든. 우리 신랑이 원산 갈차는데(가야 하는데) 우리 시아버지 생신이 오월 스물 하루 날이야. 그래 내일이 우리 아버지 생일이니까 내 대신에 다른 기관사를 보내고 자기가 양양을 갔다가 육이오 사변이 나면서 함폴 해가지고<함포를 쏴서> 기관차를 때렸잖아. 광산 들다보는데 거길 때려서<때렸어>. 그때 첨으로 쌈나는 때요(전쟁 난 때요).

애 아빠가 나오면서<출근하면서> 사변하는 것도 모르고 그렇게 나왔는데. 아침에 철도간사서 신랑이 차 가지고 몇 시에 온다하면 밥 지서서<지어서> 내놓고는 기다리고 있는데. 밥 해놓고 신랑 오나 하니까. 기관차가 왔다 갔다 하는데 남의 신랑을 보고, 모자도 다 쓰고 그러케니까 몰라, 우리 신랑 왔다고 그러고 말하고 있는데. 철도국서 사람이 와 가지고 사평이라는 데 거길 갔다 와야겠다 어야까나<어찌 할까나>. 주복록(남편 이름)씨가 죽었데.

아들 거그서 하나 낳아서 죽고, 또 하나 낳은 거 업고 나왔거든. 지금 육십 두 살이야 지금 그거 업고 나온 아들이. 그리고 여기서 다른 인간 만나서 6남매를 낳았어. 아들 둘 딸 너이. 그래 아들 하나 죽고 데리고 온 아들 하나하고 여가 와 내가 너무 너무 고생했어. 아들 밥도 귐기고<굶기고>. 우리 큰아들 막 귐겼어. 굶어도 얼매나 벼락스러운지 굶어가지고 가서 낭구<나무> 한음질<한움큼> 해갖고 왔어. 낭구 쌂고(삶아 먹고) 살았어요.

시아버지 따라 월남

친정에선 1남 2녀 썼는데<였는데> 날 시집보내고 우리 엄마가 또 둘을 낳아서 키웠데. 가들 모르고 1남 2녀만 내가 알지. 내가 맨 맏이지. 고럼. 아주 첫째여. 그래가지고 일본 공출한담 바람에 열여덟 살 먹고 안 보낸다는 걸 시집을 보냈어. 그래 신랑이 육이오 사변에 죽고 그래도 시집에서 나를 그렇게 위했어. 그래 친정에 갔다가 육이오 사변 나고 분주하니까 그때 옛날에 우리 친정동네를 수동 꼴탱이<산골짜기>를 우리 시아버지 오셨데이. 우리 시아버지 오셨다고 내가 반갑다고. 신랑 없는데 반가워하니까는 시아버지 돌아 앉어 울더라고. 우리 복덩이(큰 아들)를 끼어안고 업고 시집으로 갔어. 친정하고 아니 떨어질 건데(헤어질 건데) 시아버지를 따라갔지요. 거 가서 좀 사는데 그때서부텀은 쫓겨서 뭐 여기서 폭격을 하던지 하면 군인들이 왔다 갔다 하면 삼일포 그 삼일포 올라가서 피란 가서. 그게에 4월 달이 되니? 스물네 살에 과부돼 가지고. 삼일포 피란 가 있는데 모두 아군들 사람들이 와서 “살라면 빨리 나오라” 하니까 우리 시아버지가 탁 빨리 데리고 나와 가지고 집에서 쌀 좀 허고 뭐 우리는 큰 암소하고 고 옆에 집은 우차하고. 이렇게 해서 우차다<우차에다> 우리 소에다 싣고 그 집 살림하고 우리 살림하고 싣고 나왔어.

그래 인제 나옴 양양다리만 건너 와면<건너오면> 산다고 빨리 오라드라고. 그래 가지고 부랴부랴 나가고 있는데 또 고가 있으면 또 쪼금 더 나가라 그러고 또 고가 있으면 더 나가라고 그러고. 여기가 한끝녘 왔어<마지막으로 왔어>.

더 이상은 안나가고. 중앙시장이 아주 촌이더라고. 아주 너무너무. 여기는 솔밭이고 물도 안 나와서 저기서 물도 사먹고 그랬어. 모레 밭이고. 나무 그저 꽂아놓으면 내 땅이야. 저 짝은 허허벌판이지.

“대한민국에 나밖에 없어”

교회 생활도 한 이십년 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아무 것도 몰라. 절에는 또 얼마나 다녔다고. 첨엔 절에도 한 이십년 다녔다. 그래가지고 이렇게 댕긴다고. 그냥 왔다 갔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바이마을? 거기 분들 여기(성암교회) 다녀요. 나룻배 거기 있는 데 우리교회 다 다녀요. 그 분들이 다 젊은 분들이니까. 이북 사람을 아바이라 그러잖아. 피란 나온 사람들이 거기 집중해서 살잖아. 할머니는 아마이라 하고 할아버지를 아바이라고 그래. 이북 할아버지들 산다고 아바이 마을이라 그래. 아바이 순대. 거기가 거기야. 난 아바이 순대 못 먹겠더라.

남쪽보다 잘 살았어. 이북에서 산 사람들은 무식한 사람이 없어. 글 다 배웠어요. 밸루 가난한 건 모르고, 나는 뭐 요긴데 뭐 여긴 한가지야<마찬가지야>. 강원도야. 그래도 여가 삼팔 이북이에요. 거가 지금 막혔다. 금강산 쪽이니까. 그래서 못 들어가지. 우리가 그마치<그만큼> 빼있은 거야<빼앗은 거야>. 삼팔선이 양양인데 많이 뺏어낸 거지 전망대까지 뺏은 거잖아. 금강산까지 뺏었으면 장하지. 금강산이 최고지.

시집간 데는 괜찮게 살었지. 뭐 잘 살진 않았어두. 우리 시아버지랑 아주 일정<일제시대>때 농살 많이 해서 공출도 마이 하다가. 그 땅이 일본 사람 땅이여. 자택도 내뻐리고<내버리고> 나왔구만.

공산군이 쫓아낸 게 아니고 살라면 빨리 나오라 그래요. 이남 따라 나왔지요. 뭐 해코지할 게 있겠남. 그래도 좀 말하는 게 빼에<뼈에> 맺히지. 왜 우리 시어머니가 어떻게 했냐면. 그때 이승만이나? 이승만이가 왜 손을 안 들어 우리 아들 죽게 했냐고 그렇게 하면서 울었다. 그러까는 거기 이북 사람들이 우리 시어머니 보는 앞에서 “병 병<욕설>” 그랬거든. 그 때 우리 시어머니를 못 잡아 가니까 우리 시아버지 건강했거든. 우리 시아버지를 붙잡아가 막 때리고 그랬어. 그러니께는 이북에 있는데 그 때 이승만이가 이남 사람이지? 아이다. 아이다. 김일성이가 왜 손을 안 들었냐고 그랬다고 맞았어. 우리 시아버지가. 쫓겨 갔다 빨리 그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피란 나왔지. 그 사람들은 우리 도망 나오는 것도 못 봤어.

우리 시아버지가 아주 이를 부득부득 갈면이<갈면서> 들어가면 그걸 가만 안 놔둔다던 우리 시아버지가 여기서 돌아가셨어. 시집 식구 시동생 하나 거 있지요. 우리 신랑은 기관사고 우리 시동생은 기관조수. 기차가 지금은 그걸로 댕기지만 그때는 석탄으로 했어. 우리 신랑은 기관차만 몰았지.

왜 놔두고 왔냐면 우리 시아버지가 뭐라 그랬냐며는 “아들 덜이 첨에 들어오게 되면 이 젊은 사람들은 좀 안 좋데니 너는 피해가 있어라. 너그들은 괜찮다.” 그래 우리 시동생을 보냈다. 어디 숨어가 있으라고. 그래서 놔두고 나왔잖아. 소식도 몰라.

그 때 시아버지 노룩동운<노력동원> 왔다가 가시는 데 따라왔다니까. 신랑도 없는데 우리 시아버지는 어떻게 가잔 말도 못하지. 그런 며느리를 어떻게 가잔 그러나. 근데 내가 따라 나섰다니깐. 정들어가지고. 단지 시집 식구 따라 나와서. 시집 식구는 다 돌아가시고 대한민국에 나 밖에 없어.

“부모 생각 나나 마나지”

부모 생각? 그럼 나나 마나지. 아주 나와서 굶으면서 아들 굶기면서 살아가지고 다 잊어버렸어. 엄마 아버지야 벌써 백 살이 넘었는데 다 돌아가셨겠지. 여기 가까운데 서람<있는 데도> 못 가봤어. 아주 이북 사람들이나 갔지 가까운 사람들은 한 번도 (이산가족상봉) 신청 안했어.

그럼 보고싶으나 마나(보고 싶지). 우리는 아버지가 저기 훈장이니까 저기 심부름 시키면 내 승질이 저기 팍 뛰어갔다 와야 하는데 여식이 무슨 걸음 걸이를 그렇게 하나. 아주 꼭실말(할 말) 만 했지 아버지가. 여기 와서도 너무 착했던 게 과부로 사니까 영악시러워 져서 이북사람 쫓겨 가 나한테. 내가 나빠졌다고 내가. 고생시러니까 밥을 귐기니까 젤 가슴 아픈게 밥 귐기는 거다.

첨에 피란 나와서는 소가지(고) 왔지 우차다가 쌀을 싣고 나와서 맷 해<몇 해> 동안은 잘 살고 있다가 시부모가 다 돌아가시니까 옛날 인장표<영국제 싱거미싱>. 인장표 보담 고담에 나은거 매표 가지고 나와서 바느질 품팔이 해 먹었어. 아이고 누가 좋은 신랑 있다고 가라고 가라고 하니까. 그 째 그것도 내가 내 입으로 못가고 친정 고모부 막내 고모부가 여기 나와있는데 우리 고모부자 우리 아버지고 우리 아버지이자 고모부니까 부모니까. 거가서 우리 고모부한테 그래 갔고 나를 시집을 보냈다.

경상도 사람인데 아주 착하다고. 우리 아저씨는 낙산사 절 짓는 거서 일하고. 스물 다섯에 나와 스물 여섯에 나가. 열 살 더 먹더나<열 살 연상>. 그 사람은 객지로 돌아 댕기다 금강산에다 아들 하나 딸 하나 마누리 내삘고<내 버리고> 여 나와 버렸다. 그러게 만나 사는데 아이고 술도 술도 먹고. 고상을 너무 너무 했어 내가.

내가 벌어 먹었는데. 바느질 감을 이렇게 재봉해 먹고. 그찍에 여기 아가리배라는 게 큰 배가 들어왔어. 도라무깡<드럼통> 돌리러 댕기더라고. 글케 벌어봤자 술이나 자시고 그랬지.

둘째 아들 죽기 전 예수 영접

그저 아들만 생각하고 살았어. 지금도 이 하나님 믿어도 하나님 우리 자녀들 항상 보살펴 달라 그래. 지켜주세요 하나님.

둘째가 죽었거든. 우리 작은 아들이 칠남매 중에. 그게 술 먹고 저 동문회 하러 갔다가 넘어져서 뇌출혈로 죽었데이. 거저 이거 내가 살린다고 시내병원 갔다가 못 고친다 그러니까 사천 병원 가서<갔어>. 우리 오막살이집 무허가집 그 거라도 팔아서 곤쳐야<고쳐야> 한다고 그랬다구. 근데 갔어<죽었어>. 마흔 다섯 살 때 결혼도 못하고.

가가 살아서<살아있을 때> 교통사고를 만나서 다쳤댔어. 가 있을 적에 교회 댕겼는데. 누가 교회가자 그러면 안 간다 안 간다 내가 그랬거든. 글씨 내가 아들이 그렇게 교통사고 만나서 마음이 다급해가지고 그래 김 장로님 따라갔지.

절에 오래 댕기나 보니까 새벽기도를 이렇게 혼자 나오니까 내 눈에 뭐가 보여서. 요 들어오는 문턱인데 사람들이 막 이렇게 이렇게 하는 거 같아. 그래 가지고 가방을 갖다 놓고 기도하려고 앉았다가 무사워서<무서워서> 장로님 집 가서 주무시는 걸 깨워서 날고<나하고> 가자고 같이 오니까 아무 것도 없어. 그래서 그 때 장로님만 따라 다녔어.

(아들은) 저 병원에 육개월 동안 있다가 나와서 우리 집을 무허가집을 지어다놓고 죽었어. 살아가지고 육개월 동안 가도 교회 대니면서, 가는 설설해<서글 서글해>. 교회도 매칠 안 댕긴 게 “예수 예수 믿는 거, 받은 증거 많더라.” 그렇게 하다 죽었잖아. 동문회 다녀왔다가는 지절로<제 스스로> 자빠졌어.

할아버진 내가 마흔 한 살 때 갔는 데 뭘. 아파 가지고. 간 경화로. 아이휴(한숨). 형제들도 못 보고 죽겠어. 내가 아무래도.

고아원에 맡겼던 시동생

또 시집간 시누가 아들 데리고 서이<셋>를 데리고 우리 따라 같이 나왔어. 그 수발까지 다했다고 내가. 다 하다가 가들을 고아원에 다 보내고. 시누가 죽으니까. 시누 남편이 죽어서 우릴 따라 나왔는데 시누 고저 죽었어.

시동생도 하나 내가 시집가니까 새로 낳았던데. 그걸 내가 엎어 키웠는데 피란 나왔다가 고아원에다 줬더니, 고아원에서 뭐 인저 다 커 가지고 어디 살다가 누가 칼로 찔러 죽였데. 몰라 누가 죽였는지. 고아원에서 나와 가지고 사는 데 같은 배중간이겠지 친구들이겠지. 죽었어 그래서. 먼 쪽까지 시누하고 나하고 가서 저 동산에다 어디다 묻었는지도 몰라. 막내이 시동생.

시어머니 시아버지 다 돌아가시고 그 때 내가 안 보낼라니까. 옛날에 읍장하던 집에 방을 얻어가 내가 살았거든. 그 읍장이 나 안 보낸다 그러니까. “자네가 그걸 데리고 있으면 밥은 맥인다고 쳐도 공불 못시키잖나. 그러니까 고아원. 여느 사람은 고아원에 보낼라고 애를 써도 못 보내는 데 얘들은 고아원 명부가 뚜렷헌데 왜 안 보내냐.”

하나님 믿고 마음 편해

그래도 하나님 믿고 좋지. 달라진 건 모르고 마음이 편해. 그거지 뭐. 나는 교회 댕긴다 해도 기도도 잘 할 줄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그래도 마음이 편해. 새벽기도 댕기다 댕기다 이제는 다리가 맥이 없어 넘어질까 봐 안 가. 매일 갔지.

통일 기도는 안 해봤어. 고향엔 뭐 별로 가고 싶진 않지만 형제들 그냥 살아있나 못 살았나 그것만 생각나지. 시동생 소식도 못 듣지. 우리 동생들 소식도 모르는데 뭘.

고저 자녀들 잘 되는 것만 소원이지. 나는 고저 이렇게 살다가 오래 아프지 않고 고저 밸안간에 죽는 거 그게 소원이지. 오래 아프면 자식들 고상시킬 거 같아서. 그나저나 식사부텀 어떻게든 하고 그러지요. 시장하겄는디. 찡하다 막. 배가 고프다니까.

■ 연보

1926년 고성군 수동면 하탄에서 2녀1남 중 장녀로 태어남

1944년 고성군 외금강면 사평리로 시집. 철도원 조복록(당시 20세)씨와 혼인. 당시 18세. 슬하에 2남(1남은 병으로 사망)

1950년 6월 남편 조씨 포격에 사망. 시부모 따라 속초로 피란

1952년 재혼, 재혼한 남편은 열 살 연상. 41세에 지병으로 사망. 슬하 6남매(둘째 아들은 45세에 지병으로 사망)

■ 성암교회는

속초시 아바이마을 최초의 교회이자 유일한 교회다. 한국기독교장로회 강원노회에서 파송한 신광선 목사가 1964년 청호동 아바이마을 시장 한복판에 69㎡(21평) 교회를 짓고 예배를 드린 것이 시작이다. 75년 조양동으로 이전했다가 92년 다시 청호동 아바이마을 어귀로 들어왔다(행정구역 개편으로 현재 주소지는 조양동이다). 이성헌 목사가 10대 담임목사로 부임해 교회를 맡고 있다. 아바이마을 주민의 대부분은 실향민이자 독거노인. 이에 교회는 10여년간 무료 급식, 이미용 봉사, 밑반찬 제공 등을 꾸준히 해왔다. 교회는 지역사회에 기여한 공로로 속초시로부터 지원금을 받았고, 연내 개관을 목표로 성암노인복지센터 건립에 들어간 상태다. 출석성도는 150여명. 70%가 60세 이상이다.

속초=정리 이경선 기자·사진 곽경근 선임 기자 boky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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