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예진 목사의 후손을 만나다
[미션라이프] 독립운동가 김예진 목사(1898~1950). 순교자 주기철 손양원 목사의 삶은 한국교회에 잘 알려져 있지만 민족의 십자가를 지고 간 애국지사 김 목사의 삶은 여전히 역사 속에 묻혀 있다. 김 목사는 1920년대 독립군 자금을 모으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는 김구 여운형 김규식 안창호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치며 평안남도 도청과 중국 상하이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한 혐의로 수년간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3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자가 된 그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이다 수차례 투옥과 검열 끝에 목사직을 면직 당했다. 정부는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해 62년 건국공로훈장에 추서했으며, 유품을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안치했다. 김 목사의 순교 60주년을 맞아 최근 서울 서초동 섬김교회에서 드려진 순교기념예배에 참석한 3녀 광명(82), 4녀 순명(78), 차남 동수(75)씨를 만나 아버지 김 목사의 삶을 들어봤다.
“아버지는 독립군 자금 모집책으로 활동하다가 1920년대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셨어요. 30년대 귀국 후 독립투쟁의 한계를 느끼고 ‘교회만이 이 민족을 살릴 수 있다’며 신앙을 통한 민족 구원의 길을 제시했습니다. 해방 후 서울 후암동 집은 독립운동가들이 모이는 베이스캠프였죠. 50년 공산군에게 체포돼 경기도 미사리에서 총살형을 당하기 전까지 당신은 비극의 한국현대사를 몸소 안고 가셨습니다.”
숭실대 사회복지대학원 초빙교수로 있는 차남 동수씨의 얼굴이 비장해졌다. 그는 미국 노폭대 사회사업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은퇴 후 2006년 한국에 들어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체제에 반대하며 반독재 운동에 나서 90년대까지 ‘반정부 활동가’로 낙인찍혀 귀국을 못하거나 들어오더라도 늘 감시요원이 따라 붙었다. 부친의 DNA가 그대로 흐른 것이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기억나는 건 사랑방에 늘 동네 아픈 사람들이 있었고 아버지가 정성껏 치료해 주셨다는 겁니다. 주일성수를 철저하게 강조하셨고 성경책은 물론 모든 책을 귀하게 여기셨죠.”
사실 조국의 독립이 불가능해 보이고 일제의 탄압이 모질던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과 안정을 선택했다. 하지만 김 목사만큼은 달랐다. 김 목사 집안은 동네에서 방앗간을 할 정도로 부유했지만 독립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가시밭길을 걸었다. 미운털이 박혀 일제에 의해 파산하고 집안 여기저기에 차압 딱지가 붙었다. 조선인 거래처는 그 사실을 알아채고 오히려 매몰차게 돌아섰다. 살기등등한 일본 순사들은 가족들의 생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렇게 독립유공자 집안이 망하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자녀들 또한 독립운동가 또는 혁명가의 자녀라 해서 가난 속에서 여러 차별과 감시를 받았다. 그렇다고 해방이 됐다고 나아질 것은 없었다.
“아버지는 1950년 8월 한국전쟁 때 공산군에게 끌려가 총살 당하셨어요. 사상범으로, 폭탄 투척범으로, 혁명가로, 수배자로, 죄수로 쫓기며 얻어맞고 헐벗고 숨고 갇히다 결국은 그렇게 돌아가신 겁니다. 집안이 무척 어려웠는데 어머니는 쌀 한 톨 버리지 않고 악착같이 돈을 아껴서 우리 6남매를 키우셨어요. 그때 어머니가 고생한 것만 생각하면….”
4녀 순명씨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평생 남편 옥바라지와 자녀교육을 위해 손이 터져 피가 나고 주름살이 깊게 팬 어머니 고 한도신(1895~1986)씨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파란만장한 그녀의 삶은 ‘나라 사랑의 가시밭길에’(쿰란출판사)라는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책은 원래 돌베개출판사에서 나왔는데 절판 후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이사가 재구성했다.
“해방 후 김구 선생님을 뵈러 서울 서대문 경교장에 자주 놀러갔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는 애국심이 참 강했어요. 당시 서울 후암동에 살고 있었는데 한국인 부자가 집 앞을 지나가면서 일본말을 썼나 봅니다. 아버지가 그냥 달려가서 뺨을 때렸다고 해요. ‘여기는 한국이지 일본이 아니다, 조선 놈이 조선말을 써야지 왜 일본말을 쓰냐’고 하면서 말이죠. 아버지에게 우선순위는 하나님이었고 그 다음이 나라였어요.”
3녀 광명씨는 미국 풀러신학교 교수로 재직했던 남편 최찬영 목사와 함께 55년 한국 최초의 태국 선교사로 나가 37년간 헌신했다.
15년 넘게 김 목사의 삶을 연구하고 ‘김예진, 그의 생애와 사상’이란 책을 내놓은 이민성 섬김교회 목사는 “김예진이라는 한 사람의 삶을 통해 한국교회와 크리스천이 이 나라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알 수 있다”면서 “오늘 한국교회는 애국지사의 삶을 통해 방향성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김예진목사기념사업회는 조만간 학술발표회를 갖고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을 통해 순교자의 생애를 한국교회에 적극 알릴 계획이다.
글·사진=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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