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복이 (2) 궁핍한 시절을 이끈 어머니의 고봉밥

Է:2010-10-11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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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최복이 (2) 궁핍한 시절을 이끈 어머니의 고봉밥

나는 1965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최씨 집성촌의 종갓집으로 지주 집안이었다. 그런 종갓집 맏며느리였던 어머니는 동네에서 이름난 ‘왕손’이셨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항상 떠오르는 게 있다. 고봉밥이다. 사람들은 우리 집에 와서 농사일을 하고 밥도 먹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산봉우리처럼 밥을 푸셨다. 그것도 모자라 주걱에 물을 발라 두드리며 밥을 꾹꾹 눌러 주셨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나는 어머니가 무식하게 밥 푸는 모습을 탓한 적이 있다. 그때 어머니가 정색하며 하신 말씀은 아직까지도 기억난다.

“니가 호강에 초쳐서 남의 집 밥을 안 얻어 먹어봐서 그런 소리 하는 겨. 이 긴긴 해에 얻어먹는 밥은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는 거여. 남의 집에서 밥 먹다 모자라도 더 달라고 못하는 것이고….”

우리는 13남매였다. 어머니가 7남매를 낳고 작은 어머니가 6남매를 낳았다. 아버지가 종갓집 귀한 외아들이다 보니 작은 부인을 하나 더 들여 자손을 많이 보려 한 것이다. 작은 어머니는 어머니보다 어린 나이에 키도 크고 인물도 좋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정치나 사업으로 객지로 다닐 때면 늘 작은 어머니를 데리고 다니셨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었다. 많을 때는 예닐곱의 아이들이 동시에 학교에 갈 때도 있었다. 어머니는 엄한 시아버지 모시랴, 많은 자식들 키우랴, 그 큰 종가 살림하랴 쉴 날이 없었다. 그렇다고 남편 사랑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보다 두 살 많은 어머니는 평생 피해의식과 화병을 지니고 사셨다.

그런 어머니였지만 객지 나간 오빠들에게는 늘 미안해 하셨다. 지주 집안이라 해도 시골이기에 현금이 없고 자녀들이 많다 보니 돌아갈 혜택이 적었다. 개학이 되면 오빠들은 등록금과 쌀 두세 말을 등에 지고 타지로 떠났다. 청년이 쌀 몇 말로 6개월을 어찌 버틸까 하며 늘 마음 아파하셨던 어머니는 끼니 때마다 부뚜막에 고봉밥을 아들 몫으로 얹어놓고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곤 하셨다. 그렇게 하면 객지 나간 사람이 배를 안 곯는다는 할머니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고봉밥과 종갓집 종손 며느리 인심은 본죽을 움직이는 정신적 힘이 되었다. 사실 본죽 1호점을 대학로에 열었을 때 흔들렸던 게 있다. 열 명이면 아홉 명이 죽의 양이 너무 많으니 양을 줄이고 값을 내리라는 것이었다. 장사가 잘된다면 누가 뭐래도 처음 그대로 밀고 나가겠지만 장사도 안 되는 마당에 그런 지적을 받으니 정말 그렇게 해 볼까 하는 충동이 있었다. 그때 내 맘을 다잡아 준 것은 어머니의 고봉밥 정신, 종갓집 인심이었다. 본죽의 양이 다소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남으면 싸주면 되지만 먹다가 모자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니 차라리 많은 편이 나았다. 더욱이 본죽은 주문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죽을 쒀 내는 맞춤 죽이다 보니 더 달라고 해도 줄 것이 없었다. 그래서 청년이 먹어도 충분한 한 끼 식사에 초점을 맞췄고 먹다가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양을 정했다.

만약 그때 양을 줄이고 가격까지 낮추었으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아찔하기만 하다. 아마 지금처럼 한 끼 식사로 충분한 죽의 개념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죽이란 건 원래 못 사는 사람이 먹는 것, 환자가 먹는 것이라는 고정관념도 절대 깨지 못했을 것이다.

아 참, 올해 86세이신 어머니는 지금 청양 오빠 집에 계신데 딸의 기도에 예수님도 영접하시고 화병도 주님이 치료해 주셔서 잘 지내신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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