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회고록] “육이오때 삼대까정 몰살… 용서하제 용서하니께 이라고 살제”
전남 영광군 염산면 조애순 할머니
한양 조(趙)씨 나주에 가면 많어. 오빠 둘 언니 하나 내가 막내였어. 우리 어머이는 참으로 현명한 어머이였지. 얌전했어. 손수 옷도 짓고. 암믄. 제사? 원래 안 믿었는데 믿지 않에도 큰 거시기가 아니라 안 혔어. 큰 집이 아니다 말여.
핵교는 안 나왔제. 양학 학교에 일본 글 배운다고 대녔는디. 한문이 많았어. 한문은 근디 기억이 안 나부러.
시집은 열여섯에 갔어. 나주 공산에 사촌언니가 소개혔지. 1)공출 간다니께 긍께 간거여. 냥반은 스물넷이었지. 혼례를 마당에서 옛날 거시기로 했지. 말 타고 가마 타고. 시가집 가서 별로 안 살았어. 혼례허고 한 일년 살았을겨. 주로 친정에 가 있고 그라지. 해방되자마자 여그로 와서 쭉 산겨.
일제시대 때는 이러고 농사지어서 지대로 먹지도 못해. 다 가져가 버링께. 뺏어가서 배급 주고 그랬어. 2)나락 같은 거 3)새암에다 빠쳐갖고 모르게 찌어서 먹고 그랬어. 식구들 배급도 콩 4)되도 막 해가. 꺼퍼리도 주고. 5)됫박이로 주제. 그래 갖고 고놈만 갖고는 못 먹어. 쑥 같은 거 캐갖고 섞어 먹고 그러제. 찌어서 밥해 먹으려면 고생했어. 6)도구통에다 찌어서 먹었지. 헝게 그런 세상 산 사람은.
우리는 고렇게 까정은 안 살아봤어. (여자들은) 일도 안 혔어. 혼 서럼(하는 사람)은 허는데 그렇게 까정 안 했어. 1년에 일꾼을 들여 갖고 농사를 지었제. 아덜은 혼자 났지. 그때는 아덜 날 때 동네 집사님들이 도와주고 해서, 그 양반들이 (탯줄을) 가새로 끊고 그랐지. 딸이 셋이고 아들 다섯 낳았제. 막내이 낳았을 때가 사십 몇 살 땐가. 아들이 구했지. 하제만 나야 아들 다 낳응게.
전쟁통에 목포로 피란
육이오때 피란 당기느라고 거시기 했제. 신안군 지도 말여. 거그서 (염산교회 김형호 장로의 친구가) 식구 찾을라고 여그로 왔어. 어메 아부지 다 죽고 허다 애기가 뭐시헝게 자기가 키운다고 온겨. 그 사람 따라서 지도로 갔어. 26일 만에 목포로 내려갔구만. 진주 했으니까. 7)풍선타고 바람 부는 대로 대녔지.
피란 간다고 월계쌀을 농업창구에다 넣어 놨제. 나락을 쪄서 고놈을 깐거여. 내삘라 그랬는디 쥐가 쏟아 부렀어. 암 것도 못 갖고 갔제. 이불은 가져가고. 아들 네 살 딸이 두 살였어. 반찬은 가다가 얻어다 먹었제.
목포서 우리 언니가 살았거등. 형호 장로는 거서 집을 한 채 사고. 그때는 지름이 귀했어. 지름을 묻어 놨더만. 등유. 그놈을 파갖고 지도로 갔어. 지도서 환장해부러. 피란 갔다 와서 마당에다 묻어놨다 팔아 먹은겨. 여기 진주 되었다니께 이 냥반하고 행기(故 노병재 집사 장남 형기) 모시기 해서 같이 갔제. 나는 쪼까 있다 오고. 여가 있으면 못 살았제.
시댁 식구 삼대(三代)가 좌익에 몰살
육이오 지나고 51년 2월 달인가 수복 되었는디 우리는 집도 없어져 부렀어. 다른 사람이 살고 그러더만. 집이 없응게 행기네 집에 거거 와서 함께 지섰어. 큰 집에 아들 하나 남았지. 나는 여자라 못 보고 남자들은 가서 뭐시허지.
여러고 구덩이 파놓고 한 뻔에 잡아. 모가지 쳐서 죽였어. 사람들이 뒤에서 칼로 팍팍 쳐버려. 손을 잡으라고 여자들도 항께. 오빠 언니야 함서 열다섯 살 먹은 아덜은 안 죽는다고 막 돌고 댕기다 기어코 바닷가에다….
다 죽을 판이여. 뭣을 안 주면 안돼. 그 사람들이 요구한 대로 다 줘야 혀. 배를 갖고 뭣을 가져가냐면 전부 여그 있는 쌀을 싣고 가는 판이여. 아이고… 우리말이 안 나와. 기가 막히지. 예수 믿는 사람은 더 그래 부리고. 삼대까정 매장 당했는디 믿는 사람이 더 많애.
우리는 이 냥반만 남고 다 당해 부렀어. 인민군들이 노끈을 노병재 집사님 여게(손을 보여주며)를 쫌매 부렀어. ‘내 주를 가까이’ 찬송 부름서 물에 빠져 돌아갔제. 아주버니여. 순교하셨제. 거가 형님 뿐이여? 삼형제허고 일가족 스물두 명을 다 물에 빠쳐 죽여 부렀어.
지방 사람들이 그랬어. 월암산 그 밑에가 쩌기 임자라고. 좌익이 많았어. 그 사람들이 갈챠 줘 가지고 더 죽은 것이여.
셋째는 돌아와서 조카 네서 낳았지. 그땐 아주 말도 못했어. 이 냥반이 송장을 다 쳤어. 형제들 물에 빠진 거 그거 끄집어내느라고.
교회에 심은 낭구, 삶으로 배운 신앙
행님네 식구들 참말로 좋았제. 노 집사님 어머님 신앙이 참말로 좋았어. 일본으로 가고 돌어 당기느라고 나중에야 신앙이 들어갔는디. 쩌그 감낭구허고 오동낭구 그런 것들 다 팔아가 교회다가 심었어. 인품도 좋고. 교회 뭐 이따허면 다른 거 다 제차 두고 맡아서 할 정도로. 나는 여그 와서부터 교회에 나갔지. 그 전에 교회는 안 댕겼어. 큰집이 아주 전적으로 모시니까 영향 받아서 댕기게 됐지. 교회가 저가 멀리 있었거든.
김방호 목사님은 다리 8)카부에서 죽었제. 그 양반 사모님이 참말로 좋았지. 내가 그 쩍에 죽게 생겼었어. 9)옘병 거시기는 사람들이 들다도 안 봐. 줄 딱 처버려 못 들어오게 했지. 절대 넘어가덜 않어. 근디 죽 쒀 갖고 다니면서, 깨죽을 쒀 갖고 와서 먹여줬어. 김 목사님은 참 고상한 양반이제. 교인들이 살릴라고 얼마나 숨켜줬어.
옹삭해도 나눠먹던 시절
10)옹삭혔제. 그때게 목사님이 없는 사람들 11)괴비에다 쌀 담아서 주고 그랐지. 배급도 시방같이 목사님들 많이 안 드렸어. 어려운 판이라. 지금처럼 식량 많이 안 줬어. 잊어도 안 부러. 목사님네가 여섯 식구인데 서말 드렸어. 목사님 사례금 얼마 줬는지도 몰러.
근데도 목사님 애들이 학교 가면 싸 갖고 다님서 다 줘불고. 목사님네는 죽을 쒀 잡쉈어. 식량은 구제해버리고. 김치, 12)실가래기로 죽 쒀 먹었고. 형편을 잘 몰랐어. 신앙이 별로 없어서 몰랐어.
그랬는디 셋째(남기) 낭기가 카라미 먹다 새또막(철조각)을 삼켜버렸거든. 목포로 강게 내는 기계가 없다데. 사진만 찍었는디 광주로 가야 쓴다해서 광주 갔는디. 철야기도 함서 얼마나 아주 그런 거시기를 몰랐서라우. 우리는 교회 다녀도 깊이 접근 못했다 이거제.
예수님은 언제 만났는가 몰라 나도
예수님은 언제 만났는가 몰러 나도. 여하튼 인자 곤사는 다 죽고 나만 살았응게. 곤사될 때 믿음이 젤로 좋았지라. 새벽기돈 안 빠지고 다녔응게.
그때 정신 이성헌 사람을 우리가 가서 기도하고 오면 나아 뿌렀어. 느닷없이 거시기 해 갖고 일곱 마구가 들어왔다고. 거시기 목사님. 김원홍 목사님이 와서 우리가 같이 쫓아다니면서 그래 갖고 많이 쫓아냈어. 눈 요러고 달라붙으면 무서워 죽갔어. 나만 오라고 혀. 다 나섯당께.
그 전에 쩌그 갯벌에 살 때 말여. 목사님 그분 마눌도 산동네 여기 밑에서 살았어. 은서 엄매 마져. 그 엄매가 그렇게 뭐시했어. 방에다 가다 버립고. 내다보면서 야단했어. 미쳐부러 가 그냥. 강 집사는 무서운 줄도 몰라. 죽인다고 달라 들고 그랬어.
온유했던 목사님, 그리움
목사님들은 다 좋제. 한 양반 참 거시기한디. 그 목사님 돌아가셨어. 키도 크고 거시기항게 돌아가셨어. 참으로 울었어. 너무나 서운해서. 그 냥반이 그래 순해갖고 13)가랑헌게 얼마나 거스기 좋게. 사모님도 좋고. 목사님들이 2∼3년을 못 갔어.
십일조 허다가 못혀 지금은. 젊었을 땐 혔지. 나쁜 일 그런 건 없었고, 마귀하는 짓이지. 성경도 별라 못 읽었어. 눈이 거시기해 부링게. 아이고 몰라 나는.
나 아픈 제가 12년 되았어. 칠십 살에 그랬응게. 암찌롱 안타가 풍이온거야. 쓰러지지는 않았는디 방에서 자빠져 갖고 다리가 끊어졌어. 화장실도 못 갔제. 여름이제. 종합병원에 갔어. 괜찮았는디 허리가 아파 부렀어. 허리에 뭐신가 뾰족 뾰쪽하고 수술도 못 허고 거시기해 갖고. 더 못 인난다 혀서 지팡이 그러고 당겼제. 못 댕겼지. 여그 딸 허너 살고 아들 둘 살고. 저들이 (밥) 짓지.
금실 좋은 부부
(부부 사이는) 여칸 좋구만. 어찌 안 싸울까. 싸울 때는 재밌어요. 할아버지가 성질이 급헌 사람이거든. 한 바쿠 돌다오면 다 풀어져 버려. 암 껏도 안 거 갖고 그러제. 급허지 성질이. 논에 가지 말라 혀도 새벽부탐 논에서 일하다 더위 먹어서 입원 혀더라고.
(미모가) 설또(설도)에선 안 빠졌었제. 젊어선 서울도 가고 어데도 가고 갔제. 계는 안 해봤어. 화투 뭐여 그런 것도 안 했지. 제주도 까정도 가봤는디 어디가 좋은지도 모르겠구만.
설악산 여행 가갔고 비와 부러서 케브(케이블카) 머시냐 그것을 못 타봤어. 흔들바우는 갔다 와봤어.
젊었을 때 교회가 젤로 왕성했지라. 300∼400명. 우리 교회 지섰고 여덟 개로 나눴지라. 교회가 갈라져 부링게. (성도수가) 많을 때가 좋지. 교회 안 옮겼제 여그서 상게.
부흥회에서 만난 손양원 목사 그리고 엑스플로 74
전쟁 나그 전에 손양원 목사 부흥회도 혔어. 교회에서 했제. 하도 오래돼 가 말씀은 격도 못해. 거시기까정 갔었어. 순교한 교회까정. 아 여수 있잖여. 그때는 총회를 하면은 5일간은 허제. 새벽부터 암믄. 아 그 손 목사님 쪼끄마해 갖고 당차지. 목소리는 웅장혔지.
14)엑스포가도 갔고. 육 여사 돌아갔을 때. 74년 여름에 여의도광장에서 헐 때 그 때 갔제. 교회에서 모다 갔제. 순복음교회도 들어가 봤어.
그때게 엑스로 헐 때. 교회 지슨다고 해서. 크더만. 가세 변두리는 완전히 안 짓고 공사 거시기하고. 손만 데면 기도하면 탁 자빠지고 자빠지고 그러더만. 그래 갖고 어쩌고 하면 인나고 인나고 그러더만. 요사이도 텔레비전으로 들었어. 여가도 설교방송 다 나오제.
말도 못혔제. 거가 뻘땅이더만. 화장실도 어쩌고 해서 없고. 그러니께 각 군발로 펴시를 해갖고 교회 거시기를 딱 딱! 말도 못해. 엑스포 책 읽다가 어디로 가버렸네. 마당에서 비는 와도 그 큰 반경에서 말도 못혔지. 백만 명이 왔응게. 외국서 목사님들이 다 왔겠더만. 텐트 속에서 잤제. 나 혼자 갔어. 저 냥반은 어디 잘 안가.
하나 남은 기도제목
손주도 컸제. 다 잘 살고 있으니까. 헌디 신앙이 없어. 안 믿어. 그것이 내가 기도하는 거여. 딴 애들은 다 믿는디 우리 아들들이 안 믿으니까. 모르제. 나 살아서 그것들 나와야 겄는디. 어릴 적엔 대녔지. 새벽에 내가 업고 다녔는데.
땅이 모르겄네. 많았제. 그 쩐에 순교당한 거시기가 부자였거등. 밑에 살았는디. 그때도 없어져가 거시기를 해 갖고. 그때는 말도 못했는디. 사정이 그랬어. 이웃마을 사는 사람들이 그랬제.
우리 아들 여그서 망해 갖고 논도 팔긴 혔지. 뭐시기가 불나 부렀어. 암 껏도 못 끄집어내고 다 타 부러서 거시기했지. 초가집이었거든. 아들눔 집이지. 거가 지금 횟집. 몸뚱이만 나와 갖고 빚으로 집을 지섰어. 논도 잽히고 그랬지. 인자는 다 갚었어. 말도 못했지. 아프고 나성께 교회도 못가고 불 나 가보도 못했지.
내 이름은 사랑
사랑애(愛)자여. 순? 그건 한자로 나도 몰라. 부모가 졌지. 우리 아버지 농사 일 혔지. 옛날에는 말도 못허게 잘 살았어. 일제 때 그러니께 다 거시기하고 못해 부렀지.
기도를 허기는 허제. 애기들 클 때는 즈그들 잘 커라고 나쁜 짓 안하고 좋게 거시기 하라고 하는 거고. 아플 때는 머리에 손 얹고 기도허제.
평소에는 그냥 마음으로. 암튼 새벽기도는 항상 갔어. 못 나가 인자 여런 데는 못 나가제. 추석 때 애기들 오면 상 차리고 그런 건 없어. 먹는 건 허제. 송편도 허고 그래. 암튼 배곯은 것 그런 것은 안 해봤어. 감사하제.
긍게 걸어서 교회나 한 번 가봤으면 그게 소원이요. 내가 내 발로 걸어갔고. 그 전엔 몰랐지. 그것이 젤 큰 소원이여. 욕심 그런 것은 없어. 지방 사람들은 용서하제. 용서하니께 이라고 살제.
1)정신대로 끌려감 2)벼 3)샘 4)콩 한 되(열 홉)만큼 5)적은 양의 쌀(됫박으로 주는 쌀) 6)절구통 7)돛단배 8)하부의 일본말 9)장티푸스 10)궁색하다 11)호주머니 12)시래기 13)유하다 14)1974년 8월 13∼18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대규모 전도집회. 고 한경직, 김준곤 목사가 강사로 섰다.
영광=정리 이경선 기자·사진 곽경근 선임기자 boky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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