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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풍향계-허균] 다시 돌아온 광화문

[시사풍향계-허균] 다시 돌아온 광화문 기사의 사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경복궁을 창건하고 근정전 어좌에 남쪽을 바라보고 앉아 요순시대 재현의 원대한 꿈을 만백성 앞에 고했다. 옛날 순(舜) 임금이 몸을 공손히 하여 북을 등지고 남을 향해 앉아 문명을 밝힌 것과 다름 아니었다. 남면(南面)하고 정치를 한 것은 정(正)을 근본으로 삼은 때문이다. 경복궁을 설계한 정도전이 남문을 정문(正門, 세종 때 광화문으로 바뀜)이라 이름한 것은 남면하여 다스림에 있어서 ‘바름’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으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왕이 근정전 용상에 전좌할 때는 근정문, 흥례문, 광화문을 일제히 여는 것을 정식으로 삼았다. 모든 문을 활짝 열면 왕의 시선은 광화문 중심을 관통하여 육조거리를 거쳐 남쪽 멀리 시정(市井)까지 이르렀다. 명령과 가르침이 모두 이 문을 통해 나오고, 올리는 의견과 아뢰는 복명이 반드시 이 문을 통해 들어왔다. 문을 닫아서는 괴이한 말을 하는 부정한 백성을 거절하고, 문을 열어서는 사방의 어진 이를 오게 하였다.

‘바를 正’을 강조한 정도전

광화문이 겪은 첫 번째 시련은 임진왜란이다. 난리 통에 한양의 모든 궁궐이 잿더미가 되는 판국에 광화문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왜란이 끝난 후에 다른 전각들은 방치되었으나 광화문만은 높은 상징성 때문에 북쪽의 신무문과 함께 복원되었다. 그 후 영·정조 시대에는 경복궁 옛터가 궁의 북서쪽(현 궁정동)에 있는 육상궁(숙빈 최씨의 신주를 모심)의 참배 길이 되기도 했다. 그때마다 창덕궁에 있던 왕은 광화문을 거쳐 영제교를 건너 폐허의 근정전, 사정전 터를 지나 신무문을 빠져 나가곤 했다.

왜란 후 270여년 동안 광화문은 경복궁의 흔적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고종 대에 와서 정의의 신수(神獸) 해치의 상을 거느린 장엄한 문으로 부활하게 된다. 해치상이 있는 곳에서 광화문에 이르는 넓은 공간이 성역화되고, 그 범위 내에서는 대소인을 막론하고 말이나 탈것에서 내리게 하는 규제가 뒤따랐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광화문은 또다시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다. 식민지 수탈이 본격화될 즈음 일제는 경복궁 내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광화문을 그대로 둔 상태로는 청사의 위용을 드러내기 어렵다고 판단한 그들은 광화문 철거를 계획한다. 그러나 일인 야나기 무네요시 등 양심 있는 학자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한 발 물러나 완전 철거 대신 해체, 이전하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1927년 무더위가 한창일 때 광화문은 계획대로 해체되어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다. 제자리를 잃은 광화문의 모습은 엎어진 둥지의 새알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6·25전쟁 때 포탄을 맞아 목재 부분마저 타버리고 화강석 축대만 덩그렇게 남게 되었다. 그 후 68년 중앙청 건물(옛 조선총독부 청사) 앞으로 옮겨 목조 부분을 시멘트로 지을 적에 청사 건물과 평행을 맞추는 바람에 원 위치에서 10여m 이상 벗어나고 남북 중심축에서 3.75도 틀어졌다. 그것은 복원이 아니었다.

틀어진 역사도 바로잡히길

우여곡절 끝에 광화문은 3년8개월의 여정을 거쳐 2010년 8월 15일 원형을 갖추고 우리들 앞에 섰다. 조선 태조 4년(1395) 9월 신축된 지 615년, 고종 2년(1865)에 중건된 지 145년 만의 일이다. 광화문을 제 모습으로 제 위치에 복원한 것은 경복궁 복원사업이라는 용 그림에 눈동자를 그려 넣은 것과 같은 뜻을 가진다. 조선 정궁의 정문으로서 광화문이 가진 막중한 상징성을 회복하는 일임과 동시에 일제가 파괴하고 비틀어 놓은 조선 궁궐 제도의 중심 뼈대, 나아가서는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활연히 트인 광화문광장에서 바라본 광화문의 모습이 그렇게 당당하고 듬직할 수가 없다.

허균(한국민예미술연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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