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해철 (6) 목회인생 45년 중 루터교회서 43년
한국에 루터교가 들어와 활동을 시작한 것은 6·25전쟁이 끝난 1958년부터다. 세 명의 선교사가 1월 13일 서울에 도착해 선교를 시작했고, 9개월 뒤 지원용 박사가 귀국해 한국루터교선교부에 합류했다. 교파 분열의 혼란기에 선교사들은 ‘깨끗한 출발’을 결단했다. 다른 교단들이 교회를 세우고 전도할 때 루터교는 매스컴 선교에 나섰다. 라디오용 드라마를 제작해 CBS를 통해 방송했고, 기독교 통신강좌도 시작했다. 출판매체를 통한 선교의 일환으로 59년 컨콜디아사를 설립하고, 해외 신학서적 및 일반 기독교 서적, 시각장애인용 점자교재 등을 배포했다.
나는 지난해 목회인생 45주년을 맞았다. 장로교(서울 새밭교회)에서 2년간 사역한 것을 빼면 루터교회서만 43년을 활동했으니, 어찌 보면 루터교 50여년 선교 역사를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기간 중 다섯 교회에서 사역했다. 임마누엘교회(현 도봉교회) 6년, 성누가교회(현 옥수동교회) 2년, 성베드로교회(현 부산제일교회) 5년6개월, 성삼위일체교회(현 중앙교회) 14년9개월, 그리고 루터교 선교 40주년 기념인 팔복교회를 개척하고 7년7개월을 시무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55:8)
하나님의 생각은 분명 나(우리)의 생각과 다르다는 걸 교회를 개척하며 깨달았다. 그럼 하나님의 생각은 어떻게 다를까?
루터교회의 모교회라 할 수 있는 임마누엘교회에서 시무하다 72년 1월 옥수동교회의 청빙을 받았다. 당시 선교사였던 도로우 목사님(루터대 명예총장)이 허송 전도사님(기독교한국루터회 제3대 총회장)과 함께 사역했던 곳으로 개척한 지 4년이 된 교회였다. 내가 부임해 2년간 사역하면서 교회는 배 이상 성장했고, 특히 지역사회의 센터로서 역할도 잘 감당했다. 그 무렵 나는 루터교 총회본부의 서기직과 전도위원장직을 겸하고 있었다.
우리 교단은 당시 장기전도계획의 일환으로 서울 이외의 지역인 부산에 교회 부지를 마련하고 교회를 개척할 인물을 찾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루터교회는 교회개척보다 매스컴 선교에 주력해 서울에만 6개의 교회가 있었다. 루터교가 교단의 모습을 갖추고 성장하려면 서울에서 벗어나 전국의 주요 도시에 교회를 개척해야만 했다.
부산 광안동에 200여평 땅을 구입할 때만해도 몇몇 목회자가 지원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막상 터를 갖추고 개척의지를 묻자 한결같이 “못가겠다”는 것이었다. 전도위원장으로서 몇 달간 목회자를 찾으며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선 말씀을 통해 나에게 ‘거룩한 부담’을 안겨주셨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8)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수차례 하나님께 ‘항변’을 쏟아냈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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