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나치 치하 징용 반성”… 보상 끝내고 평화지킴이 활동

경술국치 100년 기획 잊혀진 만행… 일본 戰犯기업을 추적한다

제4부 국치 100년, 이젠 해법 찾아야

① 일본이 배워야 할 ‘전후보상’ 교과서, 독일

지난 5월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와 이스라엘 미국 등에 거주하는 노인 258명이 독일을 찾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강제수용소(Concentration Camp)에 구금돼 중노동을 한 피해자들이다. 종전(終戰) 65주년을 맞아 독일 각지에서 열린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이들의 항공료와 숙박비, 식비는 독일 재단이 냈다. 재단 이름은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EVZ·Erinnerung, Verantwortung und Zukunft)’. 나치 강제노동 피해자 보상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독일 정부와 기업이 8조원에 달하는 기금을 걷어 2000년 설립한 재단이다.

EVZ는 올해만 ‘(나치 피해) 목격자와 만남’ 프로그램에 29만 유로(약 4억4000만원)를 쏟아붓는다. 학교나 시민단체가 강제노동 피해자를 초청해 경험담을 듣는 자리를 마련하면 경비를 대겠다는 것이다. EVZ는 전쟁의 참혹함을 피해자 육성으로 젊은 세대에게 알리는 일이 효과가 크다고 보고 있다.

◇2007년 ‘보상’ 작업 끝나=EVZ는 수도 베를린 중심부인 티어가르텐 공원에서 남동쪽으로 약 2㎞ 떨어진 린덴거리에 위치해 있다. 짙은 회색 벽에 고풍스러운 모습의 건물 2층을 쓴다. 직원은 42명.

지난달 28일 이곳에서 만난 홍보담당자 프란카 쿤은 “강제노동자에 대한 보상 작업은 2007년 6월 종료됐다”고 말했다. 98개국에 거주하고 있는 피해자 166만5000여명에게 총 445만 유로(약 6조7000억원)가 지급됐다. 1인당 평균 2672유로(약 400만원)씩 받은 셈이다.

강제수용소 또는 게토(유대인 강제 거주지)에서 일한 노동자에게는 평균 7670유로(약 1100만원)씩 지급됐다. 개인 소유 자산을 빼앗겼던 1만5000여명은 평균 4000유로(약 600만원), 최고 100만 유로(약 15억원)를 지급받았다. 나치 정권 시절 보험에 들었으나 보험금을 타지 못했거나 몰수당했다고 신고한 4만7000여명도 보상금을 받았다.

EVZ가 직접 피해 신청을 받고 보상에 나선 것은 아니다. 보상은 각 피해국의 이른바 파트너기관 7곳을 통해 이뤄졌다. 쿤은 “파트너기관은 공공기관과 시민단체의 중간 성격”이라며 “EVZ는 각각의 파트너기관에 보상금 총액을 지급했고, 보상금 전달이 제대로 이뤄졌는지 감사를 실시했다”고 말했다.

◇어떻게 설립됐나=당초 상당수 독일인은 ‘왜 이제 와서 보상이냐’며 재단 설립에 반대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재단이 만들어진 이유는 여러 사회적 조건이 절묘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먼저 냉전 해체가 영향을 미쳤다.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 후 나치 정권 당시 피해를 입었던 유럽인이 독일 전 지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처절한 경험을 이야기했다.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뿐 아니라 강제노동에 대해서도 뒤돌아봐야 한다는 분위기가 독일 사회에 확산됐다. 피해자들은 독일 기업이 나치 정권에서 자신들을 착취해 성장했으므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미국이 문제에 개입했다. 잇단 피해자 소송으로 미국에서는 독일 기업의 책임 의식과 도덕성에 대한 의심이 일었다. 미국 행정부가 피해자 입장에서 발언하기 시작했다. 강제노동 피해자 가운데 상당수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안팎의 압력에 직면하자 독일 정부와 기업은 각각 기금 창설 구상을 한다. 다임러-크라이슬러와 알리안츠, 바이엘 등 대기업 12곳이 준비위원회 형태로 ‘독일 경제의 기금 이니셔티브’를 만들었다. 참여 기업은 6500곳으로 늘어났다. 이 가운데 약 40%는 나치 때 존재하지 않았고 종전 후 창립된 회사인데도 합류했다. 사회 공동 책임으로 인식한 까닭이다. 이 기금이 독일 정부의 ‘나치 강제노동 보상’ 구상과 하나로 합쳐져 지금의 EVZ로 이어졌다. 정부와 기업이 각각 25억5000만 유로(약 3조8000억원)와 26억 유로(약 3조9000억원)를 냈다.

◇이제는 평화 지킴이 활동=EVZ는 보상이 끝난 뒤 과거사 연구 지원과 인권 관련 사업, 나치 피해자 돌보기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달 2일 EVZ 사무실에서 특이한 역사 발표회가 열렸다. 베를린 도심 북부 모아비 지역에 거주하는 청년 15명이 준비한 것이었다. 대부분 터키 이민자 2세인 이들은 국가사회주의와 홀로코스트의 책임을 이민자로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다.

독일의 역사적 책임을 이민자에게 이해시키려는 취지에서 마련된 프로젝트라고 쿤은 설명했다. “독일 대도시는 학생 40% 이상이 이민자 가족입니다. 그들에게 2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이야기하면 ‘우리 할아버지는 아무 일도 안했어요. 나랑 관련 없는 일이에요’라고 말하죠. 우리는 그들이 독일에서 살고 있으므로 책임을 일정 정도 나누기를 기대합니다.”

동유럽과 러시아 학생을 초청해 1년간 독일에서 공부하게 하거나 독일 학생이 이들 국가에 유학하는 것을 지원하는 장학 프로그램도 있다. 청소년기부터 서로의 역사에 관한 이해를 깊게 하려는 취지다. EVZ는 지금까지 이런 프로젝트 2100개를 지원해 왔다. 기금 운용에 따른 1년 평균 이자 수익 800만 유로(약 120억원)를 해마다 프로젝트에 투입한다.

베를린=특별기획팀 글·사진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key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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