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중 기자의 아프리카 다이어리 ③] 아프리카는 밀림서 시장으로 변신중인가
14 일 ‘야생의 시장’ 오이노마켓
월요일 아침, 우간다 수도 캄팔라에서 눈을 떴다. 아프리카에서 보내는 두 번째 주가 시작됐다. 캄팔라의 아침 풍경은 학교 가는 아이들이 만든다. 7시도 안된 시각인데 교복 차림 아이들이 새카맣게 거리에 나와 있다.
오이노마켓은 캄팔라 최대의 재래시장이다. 규모도 그렇고 인파도 그렇고 서울의 남대문시장보다 서너 배 크다. 시장은 사방으로 100m 이상씩 길게 펼쳐져 있다. 그 속을 통과하는 4차선 도로는 길이 아니라 강이었다. 자동차와 오토바이, 사람과 물건이 온통 뒤섞여 함께 흘러간다.
우간다에서 이렇게 거대한 시장을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북쪽에 접한 수단 사람들도 여기 와서 물건을 사간다. 여기 농산물은 동쪽 접경국가 케냐에도 공급된다. 동부 아프리카의 중심 시장인 셈이다.
오이노마켓은 ‘야생의 시장’처럼 보였다. 엄청나게 크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혼잡하지만,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는 대단했다. 근래 형성되고 있는 아프리카 소비시장의 활기를 고스란히 전해준다. 이런 시장이 캄팔라에 서너 개 더 있다. 시장에 가지 않더라도 시내 어디서나 노점을 볼 수 있다. 아프리카는 밀림에서 시장으로 변신하는 중인가.
오토바이택시를 타고 시장을 빠져나와 ‘아리랑’으로 향했다. 캄팔라 시내에서 가장 큰 식당이자 유일한 한국음식점이다. 주인은 중국인인데 김치찌개부터 갈비탕, 냉면, 돼지갈비까지 다 먹을 수 있다. 흑인 여종업원들이 한복을 입고 음식을 나른다. 우간다에 와서 중국인이 운영하고 흑인이 서빙하는 한식당에 앉으니 ‘세계화’라는 말이 실감났다.
식탁 맞은편에 앉은 이는 조지 무쿨라(55). 우간다 여당 부총재다. 그는 우리와 똑같이 돌솥비빔밥을 주문했다.
“1962년 우간다 경제수준은 한국과 비슷했다. 70년부터 한국이 우간다를 앞서갔다. 우간다는 66년 이후 약 40년간 전쟁과 독재, 경제적 불안을 겪으면서 출렁거렸다. 86년 집권한 요웨리 무세베니 현 대통령이 이듬해 화폐, 세금, 공공서비스, 정치 등 거의 모든 부문에서 개혁을 시작했다. 87년 이전 연 450억원에 불과한 세금 징수액이 요즘에는 한 달에 3500억원이다. 그리고 예산의 87%가 해외 원조였는데, 지금은 75%를 우리 정부가 마련한다.”
무쿨라 부총재는 경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지난 16년간 우간다는 연평균 6%씩 성장했다. 서브 사하라(Sub-Sahara·사하라사막 이남 지역)에서 경제성장률 1위다. 외국인 직접투자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전력·원유·통신·금융회사들이 밀려온다. 가장 큰 이유는 안전 보장 때문이다. 그 다음이 인프라. 도로나 통신 전기 호텔 등이 상대적으로 잘 돼 있다.”
그는 “한국은 우간다의 변화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며 “우간다에서 ‘이디 아민’(7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해 79년까지 집권한 독재자로 2003년 사망했다)을 삭제해주길 바란다. 아민이 실권한 지 30년이 지났다”고 강조했다. 이날 점심 자리를 주선한 이는 선교사 이상철(53)씨. 그는 기아대책이 이 나라에 세운 쿠미대학교 운영 책임을 맡은 부총장이다.
무쿨라 부총재는 한국 방문 경험이 없다는데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다. 인터뷰 도중 박정희 전 대통령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우간다의 무료교육에 관해 물었을 때, 그는 “박 대통령이 교육에 투자하지 않았나? 마찬가지로 우리도 교육에 투자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박 대통령은 인프라에 투자했고, 정치적 안정을 이뤄냈다. 그것을 바탕으로 경제성장을 이뤘다. 우간다도 현재 같은 루트를 따라가고 있다”는 말도 했다. 어떻게 박 전 대통령을 알게 됐는지 궁금했다.
“영어로 된 한국역사 책을 읽었다. 한국의 모든 역사가 인상적이더라. 옛날에 한국은 ‘베리 푸어(very poor)’ 상태였다. 전기와 수도가 없었다. 농업도 낙후했다. 게다가 분단 상태였다. 전쟁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이 모든 역사가 우간다와 비슷하다. 그런데 한국은 지금 세계 8위 경제대국이 됐다. 밑에서부터 거기까지 올라간 것이다. 우간다도 그렇게 갈 것이다.”
무쿨라 부총재는 정중하고 진지했다. 해외 정보에도 밝았다. 그의 휴대전화는 식사 도중 수시로 울렸다. 우간다를 어떤 나라로 만들고 싶은지 물어봤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근사한 식당에 올 수 있으면 좋겠다. 택시를 타고 이런 데 올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은 그런 사람이 너무 적다. 그러나 우간다는 변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휴대전화를 사고, 전기를 달고, 깨끗한 물을 마신다. 차를 사고, 대학에도 간다. 병원에 갈 수 있는 사람도 늘고 있고.”
15 일 “한국보다 교육열 높다”
“94년 처음 왔을 때부터 이 나라 교육열은 대단했다. 내전을 오래 치르면서 국민들이 경험적으로 터득한 진실이 있다. 권력이 있는 집안은 무사했다는 것이다. 교육받은 이는 정부기관이나 경찰, 군대에서 요직을 차지한다. 배워서 권력을 가져야만 자기 집안, 자기 종족이 살 수 있는 것이다.”
주유소를 경영하는 교민 최영석(64)씨로부터 우간다 교육열에 대한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긴가민가했다. 먹고살기도 급급한 나라에서 교육열이 대단하다고 해야 뭐 얼마나 대단하랴 싶었다. 그런데 ‘베데스다 미션 클리닉’을 운영하는 임현석(44) 원장도 같은 얘기를 하는게 아닌가.
“여기는 학교 등록금 시즌이 되면 경제가 마비될 정도다. 집집마다 등록금 마련하느라 긴축에 들어간다. 등록금 낼 때가 되면 병원에 환자도 안 온다. 대부분 기숙학교라서 등록금이 꽤 비싼 편이다. 반대로 입학시즌이 되면 시장이 엄청 붐빈다. 애들 학용품 사느라고. 이 나라 경기는 학교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학교에 가보기로 했다. 캄팔라에서 제일 좋은 중·고등학교 중 하나라는 그린힐 아카데미. 거울로 자동차 밑바닥까지 검색하는 엄격한 출입 절차를 거친 후에야 교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교정은 잘 손질돼 있고, 학생들이 입은 교복도 깨끗했다.
교감은 “우리 학교는 아침 7시30분부터 오후 5시20분까지 수업을 한다. 야간 자율학습은 시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간다에도 야간 자율학습이 있다. 그래서 밤 10시가 넘어도 불이 환하게 켜진 학교가 많다.
정문 앞에 따로 주차장이 있는 게 특이했다. 학부모용 주차장이라는데, 수백 대 주차가 가능해 보였다. 차를 가진 부모라면 거의 다 차로 자식들을 등·하교시키기 때문에 이만한 주차장이 필요하다는 설명을 들었다. 주차장 출입구를 지키는 경비에게 등·하교 때 차가 많이 들어오느냐고 물었더니 “베리 베리 매니(very very many)”라고 대답했다.
정부도 교육에 투자를 많이 한다. 2007년까지 우간다 정부의 예산 지출 항목 1위는 교육비였다. 2008년부터는 도로 건설비가 1위지만, 교육 예산은 꾸준히 2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우간다는 프라이머리 스쿨(초등학교)과 세컨더리 스쿨(중·고등학교) 모두 무료다. 중·고등학교 과정까지 의무교육을 실시하는 나라는 아프리카에서 우간다가 유일하다. 대학 숫자도 케냐보다 2배나 많다. 캄팔라 중심부에 위치한 메케레레대학교는 동부 아프리카의 최고 명문으로 꼽힌다.
이 나라 신문들은 학력고사 성적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한다. 학교별 성적 순위를 공개하고, 수석합격자의 가족사진까지 내보낸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우간다 교육열은 이례적이라고 할 만큼 뜨겁다. “우간다가 앞으로 아프리카의 리더가 된다”고 전망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다.
그렇지만 학벌사회의 그림자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일부 명문대 출신들이 공고한 학벌 네트워크를 형성한 후 요직을 모두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학력에 따른 임금 차별도 극심하다. 임 원장은 “출신 부족을 중시하는 우간다에서 학벌은 또 하나의 종족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16 일 에이즈에 걸린 13세 소년
어젯밤 캄팔라에서 차로 5시간, 380㎞를 달려 왔다. 밤 10시가 넘어 도착한 지방 소도시 쿠미. 이 외진 도시에도 호텔은 있었다. 말라리아모기 걱정에 잠을 못 이루긴 했지만.
쿠미에서 활동하는 구호단체는 수십개나 된다. 돌아다니는 외국인은 모두 구호단체 직원이라고 보면 된다. 세계 각지에서 온 구호단체가 이 지역에 밀집한 이유는 내전이 있었던 땅이고, 에이즈 환자가 많고, 난민촌이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한국 구호단체 기아대책도 우간다 사무실을 쿠미에 두고 있다.
선교사 정하희(57·여)씨는 에이즈 아동 327명을 돌보고 있다. 안양YWCA 사무총장을 지낸 후 여기 온 지 3년째. 정씨는 어느새 에이즈 전문가가 다 됐다. 그녀가 들려준 쿠미 지역 에이즈 역사는 다음과 같다.
“19년 전 이 지역에 반군 캠프가 있었다. 여기가 테소 부족 권역인데, 주변 부족이 계속 강탈을 하는데도 중앙정부가 방관하니까 주민들이 반군으로 나선 것이다. 내전이 꽤 길었고, 캠프에서 남자들끼리만 5, 6년씩 지내다 보니 에이즈가 번창했다. 사실 에이즈는 군인 사이에서 많이 발병한다. 정부군에 의해 반군이 진압된 후 간신히 살아 돌아온 남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이 동네 모든 여자들의 남자가 됐다. 그래서 이 동네에 에이즈가 퍼진 것이다.”
지난해 외국 의료단체가 쿠미시 엔예로 마을에서 에이즈 감염률 조사를 했다. 주민 60%가 감염된 것으로 나타났다. 정씨는 “우간다 정부는 에이즈 감염률이 획기적으로 줄었다고 선전하지만 현장에서 일하는 구호단체나 의사들은 에이즈 환자가 여전히 증가하는 걸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정씨를 따라 한 아이의 집으로 갔다. 아비룬 조지. 13세. 초등학교 5학년. 태어날 때 어머니로부터 에이즈에 수직감염된 아이였다. 아버지는 에이즈 환자에 알코올중독자. 어머니는 아버지가 옮겨준 에이즈로 사망.
정씨가 처음 조지를 만났을 때 그 아이 상태는 매우 위험했다고 한다. 에이즈 바이러스가 왼쪽 뇌세포를 공격해 신체 오른쪽이 마비됐고, 정신착란으로 자기 집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는 것이다. 기아대책은 조지에게 치료약을 공급하고 식량을 지원했다. 2차 감염을 막기 위해 집에 모기장을 설치하고 매트리스를 깔았다. 치료를 받기 시작한 지 2년, 조지는 다시 학교에 갈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됐다.
조지의 집 마당에는 무덤 10개가 있다. 어머니와 누나, 여동생이 에이즈로 죽어서 거기 묻혔다. 정씨는 “에이즈라고 해도 요즘은 약을 먹으면 병의 진행을 막을 수 있다”며 “약과 음식을 주고 병원 치료를 받게 하면 아이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정씨는 돌보는 아이들을 주기적으로 찾아간다. 약과 음식을 나눠주고 상태를 살피고 고민을 들어준다. 정씨가 방문하면 동네 꼬마들이 다 모여든다. 정씨는 “에이즈 아동에게 음식을 먹일 때, 밖에서 쳐다보는 아이들의 시선을 느낀다. 저 녀석들이 혹시 이 아픈 아이를 부러워하고 있나?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끔찍하다”고 했다. 곧 죽을지도 모르는 처지를 부러워해야 하는 아이들이라니.
17 일 아프리카를 떠나며
아침 7시 비행기가 캄팔라 남서쪽 엔테베공항을 출발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와 홍콩을 경유해 28시간 후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다. 지난 2주간 우리는 아프리카를 보기 위해 노력했다.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은 게 많았고, 알면 알수록 더 궁금한 게 많았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약속된 시간이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된 것이다. 우리는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캄팔라·쿠미=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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