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중 기자의 아프리카 다이어리 ②] 모잠비크 마푸토의 ‘풍경, 그리고 사람’
10일-도시화, 그리고 흑인 중산층
‘요하네스버그나 프리토리아는 21세기 현대 도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최대 도시와 행정수도를 돌아보고 난 소감을 한 문장으로 써야 한다면 이렇게 표현해야 할 듯하다. 가보진 못했지만 입법수도인 케이프타운도 비슷하겠지. 도시화는 ‘아프리카의 미국’이라는 남아공에 국한되는 설명이 아니다. 아프리카의 최빈국 모잠비크에서도 도시화 흐름은 분명했다.
요하네스버그에서 비행기를 타면 1시간 뒤 모잠비크 수도 마푸토(Maputo)에 내린다. ‘절대 빈곤’이 국가 브랜드가 된 나라, 남아프리카 국가들의 경제 협력과 자립을 목표로 설립된 남아프리카개발공동체(SADC)에서도 제외된 나라, 모잠비크는 그런 나라였다. 세계은행 2003년 통계에 따르면, 이 나라에서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인구 비율은 74.7%다. ‘하루 2달러 미만’으로 기준을 넓히면 인구의 90%가 포함된다.
고도를 낮춘 비행기가 흰 구름을 통과하자 창문 밖으로 마을이 보였다. 작고 네모반듯한 단층 주택들과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포장도로도 보이고 자동차도 오간다. 일단 안심이 됐다. 이 나라 사람들도 정글 속에서 살아가는 건 아니라는 게 분명해졌다.
“투두두-투둑.”
비행기 바퀴가 땅에 닿았다. 멀리 고층빌딩 서너 개가 보였다.
호텔에 짐을 풀고 마푸토 시내 투어에 나섰다. 차도는 포장이 됐고, 인도는 대부분 비포장이다. 시내에는 쇼핑센터도 여러 개 있다. 페인트가 벗겨지긴 했어도 아파트들을 볼 수 있다. 주유소도 있고. 퇴근 시간엔 차량 정체도 생긴다.
도시는 전체가 노점이라고 해도 될 만큼 거리에 물건을 펼쳐놓고 파는 사람이 많다. 옷가지, 식료품, 베개, 운동화, 타이어, 가구 등 뭐든지 다 팔고 있다. 어느 거리나 사람들이 북적거렸고, 시내를 통과하는 버스들은 다 만원이다.
할 일 없이, 이유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이나 한 끼를 먹으려고 두리번거리는 그런 사람들은 없었다. 분주히 어디론가 걸어가는 사람들. 손님이 될까 싶어 행인들을 예민하게 살피는 눈동자들. 그것은 이 나라가 돌아가고 있다는 걸 말하고 있었다. 모잠비크는, 아니 적어도 마푸토는 힘없이 누워있는 곳은 아니었다.
흑인들이 밀집한 곳에서 외국인이 자유롭게 보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모잠비크에 와 있다는 실감을 전해줬다. 마푸토에서는 호텔 밖으로 나갈 수도 있었고, 시장에서 물건을 살 수도 있었다. 마주 오는 흑인을 발견하면 도망치듯 차 안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치안 부재의 나라 남아공에서 내내 긴장했던 마음이 서서히 풀어졌다.
이 나라가 친근하게 느껴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따뜻한 기후다. 남아공은 내내 추웠다. 사진기자는 프리토리아에서 첫 밤을 지낸 후 감기에 걸렸다. 아프리카에 와서 감기라니? 그건 마른하늘 밑에서 벼락을 맞을 확률보다 더 희귀한 경우 아니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얘긴 어떤가? 남아공에는 스키장도 있다! 적도선이 지나는 케냐와 우간다에서도 겨울엔 감기 환자가 속출한다!
마푸토는 그리 크지 않은 도시다. 여기에 이 나라 인구의 10% 정도에 해당하는 200만명이 모여 산다. 도시로 사람이 몰리는 것은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내전을 피해 상대적으로 안전한 대도시로 이동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도심은 집세가 꽤 비싼 편이다. 외국인들이 사는 집이라면 월세가 최소 70만원 정도 된다고 한다. 시내에 있는 32평 아파트 한 채를 사려면 7000만원쯤 든다. 이 나라의 최저임금은 월 70∼80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10만원이 채 안 된다. 월세를 내거나 집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도심에서 집을 얻지 못하면 외곽으로 나가고, 그렇게 모인 이들이 신도시를 형성하면서 마푸토는 계속 확장되는 중이다.
저녁을 먹으러 해변 식당으로 갔다. 마푸토에 가면 새우와 게를 먹어야 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모잠비크는 국토가 남에서 북으로 길게 뻗은 나라인데, 동쪽으로 인도양에 면해 있다. 해안선이 2000㎞가 넘는다. 그래서 수산물이 주요한 수출 품목을 이룬다. 아프리카 국가라고 해서 다 농사만 짓는 건 아니다.
한 끼 식사비가 1인당 1만2000원 하는 그 식당에는 빈 자리가 거의 없었다. 좌석 절반은 흑인 차지였다. 몸에 꼭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고 하이힐 신은 흑인 여성, 구두닦이에게 구두를 맡긴 채 휴대전화로 통화 중인 흑인 남성, 여기서도 흑인 중산층의 출현을 목격할 수 있었다.
식당 주인은 “7∼8년 전만 해도 이 정도 식당이라면 흑인 손님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평화가 유지되니까 투자가 일어나고, 원주민 중 교육받은 젊은이들이 외국 기업에서 일자리를 얻는다. 그들이 중산층으로 형성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어떤 통계를 보나 아프리카가 가난한 대륙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그러나 ‘1인당 국민소득 얼마’ 등의 수치로만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태도는 재고해볼 때가 된 것 같다. 그런 수치는 아프리카인의 현실적 삶의 모습을 포착해내지 못한다. 평균이란 언제나 그렇듯 사실과는 다르다.
11일-모잠비크의 미래 모델 ‘모잘’
마푸토에서 남아공 국경까지 곧게 뻗은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모잘(Mozal)’이라고 쓴 대형 표지판을 만난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곳으로 차를 돌리면 단지화된 공장이 보인다. 이 공장 하나가 이 나라 수출의 절반가량을 담당하고 있다.
알루미늄 생산 공장 모잘은 모잠비크 최대 기업이다. 2000년 설립된 이 공장에는 두 차례 총 18억 달러가 해외에서 투자됐는데, 이 나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외국 자본 유치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호주 광산기업 BHP빌리턴과 일본 미쓰비시상사가 주요 투자자다.
모잘을 빼면 이 나라 생산능력은 상당히 취약하다. 종업원 1100명을 고용하고 있는 모잘의 2008년 수출액은 14억 달러. 이 액수는 모잘을 제외한 이 나라 모든 기업이 수출한 금액보다 약간 많은 것이다. 모잘이 생기기 전 수출품목 1위는 늘 새우였다. 모잘에서 생산되는 알루미늄을 제외하면 수출 100만 달러를 넘는 품목이 새우를 포함해 13개에 불과하다. 수출 100만 달러라니? 우리나라에서는 중소기업 하나가 그 정도는 수출한다.
모잘은 현재 모잠비크의 미래로 제시돼 있다. 모잠비크는 제2, 제3의 모잘을 만들어내려고 애쓰는 중이다. 모잘의 이면에 그림자가 없는 건 아니다. 알루미늄 생산은 대표적 공해산업으로 알려져 있다. 오래 일하면 폐에 무리가 온다고 한다. 모잘이 공장 노동자들을 5년 이상 근무시키지 못하도록 한 것은 이런 위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모잘에 취직하려는 사람이 밀려든다고 한다. 월급이 다른 곳보다 5배 이상 많다.
모잘 공장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기아대책 모잠비크 책임자 이상범(43)씨가 근처 공동묘지에 한국인 선교사 한 분이 묻혀 있다는 얘기를 꺼냈다. 그 묘지에 가보기로 했다.
12933. 대리석 묘지에 남은 건 번호 뿐이었다. 그 아래 이춘이 선교사가 묻혀 있다. 마푸토 인근 마톨라 지역 텍스롱 공동묘지의 유일한 한국인 무덤이다. 비석은 누군가 떼어가고 없었다.
“여기 모잠비크를 참 사랑한 사람이 하나님의 평강 가운데 누워 있다.”
이씨가 기억하는 고인의 묘비명이다. 이씨를 비롯해 한국인 선교사 3명이 돈을 모아 비석을 세웠다. 사인(死因)은 말라리아였다. 1997년 가족과 함께 선교 목적으로 모잠비크에 들어온 고인은 2000년 병의 원인이 뭔지도 모른 채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아프리카 선교 초기. 한국인 선교사들은 말라리아에 무지했다. 그의 죽음은 여기서 일하는 선교사 사이에 말라리아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무덤을 찾은 그 시간, 흑인 아주머니 한 분이 딸과 함께 무덤을 손질하고 있었다. 맨 손으로 무덤을 쓸어내고 옆에 놓인 선인장 화분들에 물을 줬다. 한국에 사는 유족이 와보지 못하는 무덤을 원주민이 보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고인이 사역하던 교회에 다녔다는 그 아주머니는 우리들을 보자 같이 기도하자고 말했다.
30세에 모잠비크에 와서 13년간 일해 온 이씨는 “선교사들의 궁극적 소망은 선교지를 떠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나라가 이곳 사람들의 힘으로 설 수 있다면 자신과 같은 선교사들은 할 일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건 아직 이 나라가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한국인들이 19세기 말 조선 땅에 온 언더우드나 아펜젤러라는 외국인 선교사 이름을 기억하듯 모잠비크 국민들이 훗날 ‘이춘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될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10년이 지났는데도 찾아와 묘지를 쓰다듬는 아주머니 모습은 그의 죽음이 쉽게 잊혀지고 말 게 아니라는 예감을 전해줬다.
저녁에는 마푸토 시내 마푸토쇼핑센터 5층에 있는 이탈리안 식당에서 남아공월드컵을 시청했다. 우루과이 대 프랑스 경기. 아프리카에 간다고 했을 때, 월드컵 시청은 어느 정도 포기한 상태였다. 그랬던 터라 아프리카 최빈국이라는 모잠비크에서 피자를 먹으며 월드컵을 보고 있자니 자못 감격스러웠다. 식당에는 한국산 벽걸이 TV가 여러 대 달려 있었다. 주변에 30여개 그룹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경기를 지켜봤다. 절반 이상 흑인이다.
호텔로 들어오는 밤거리엔 인적이 드물었다. 평소 금요일 밤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라고 한다. 다들 일찍 집에 들어가서 월드컵을 본 모양이다.
12일-마파부카 마을의 어린이날
마파부카 초등학교 앞 나무 그늘에 100명이 넘는 아이들이 앉아 있다. 물론 흙바닥이다. 아이들은 손목에 리본을 하나씩 둘렀고, 몇몇은 앞으로 나와 단체 줄넘기를 했다. 어린이날 행사가 열린 것이다.
모잠비크의 어린이날은 6월 2일이다. 기아대책 모잠비크 본부는 좀 늦긴 했지만 어린이들을 위한 잔치를 열어주기로 했다. 마파부카는 마푸토에서 차로 1시간 반을 달려야 닿는 산골 마을. 기아대책은 이 마을에 어린이개발사업(CDP) 센터를 세우고 아이들의 영양과 질병, 교육과 신앙까지 돌보고 있다.
376가구에 주민 638명. 그 중 절반 이상인 339명이 초등학생이다. 아프리카에서는 어딜 가나 노인을 만나기 어렵다. 대신 어디고 아이들은 넘친다. 아프리카는 ‘아이들의 대륙’이다. 코트라(KOTRA) 자료에 따르면 모잠비크에서 평균 기대수명은 41세에 불과하다. 0∼14세가 전체 인구의 44.5%를 차지한다. 65세 이상은 고작 2.8%. 행사를 구경하러 온 엄마들 가운데 몇몇은 임신 중이었다. 많이 낳고 많이 죽는다. 유아사망률은 1000명당 108명.
한국의 후원자들과 1대 1로 결연된 아이들이 이 동네에 90여명 된다. 기아대책은 후원자들이 보내준 돈으로 방과후학교를 열고, 학용품 공급하고, 아이들과 함께 소풍을 간다. 또 지역 지도자들을 훈련시키고, 소아마비 아이들에게 휠체어를 사준다. 자동차를 렌트해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등하교시키는 일까지 한다. 중학교는 이 마을에서 10㎞쯤 떨어져 있다. 차가 없었다면 여기 학생 대다수는 중학교에 다니는 걸 포기했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을 한국인 선교사들과 현지인 스태프가 해내고 있다. 마파부카 CDP센터 운영 책임자인 마이바스(52)씨는 모잠비크 사람이다. 그는 “여기에 센터가 생긴 지 1년이 지났는데 아이들의 삶이 실제로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하루 아이들은 그림을 그렸고, 밥을 먹었고, 게임을 했고, 태권도 시범을 구경했다. 또 비스킷 한 봉지와 색연필 한 통씩을 받았다. 한국인 꼬마 하나가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또래의 흑인 아이들을 촬영했다. 그 꼬마는 자원봉사 하러 온 교민의 딸이었다.
행사 마지막 순서는 털모자 씌워주기. 내내 구경만 하던 내가 직접 나서기로 했다. 길게 한 줄로 선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맞이하면서 털모자를 씌워줬다. 아이들의 머리는 짧았고 동그랗게 꼬여있다. 간혹 부스럼이 보였다. 소아마비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온 녀석도 있다. 모자를 씌워주면 아이들은 “아브리가도”라고 인사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이다.
털모자는 한국의 결연자들이 매월 보내주는 돈으로 사온 것이다. 이 동네는 산악지역이라서 겨울이면 춥다고 한다. 아이들은 냉기가 흐르는 흙바닥에서 잔다. 그래서 감기나 천식 환자가 많다. 센터 옆에 있는 한 아이의 집에 가봤더니 갈대와 흙을 버무려 벽을 세우고 함석으로 지붕을 이어놓은 곳이었다. 문을 열면 곧바로 방이다. 흙바닥 한쪽에 발을 깔아 놓았다. 거기가 침실인 셈이다.
그릇 몇 개, 이불, 옷가지가 세간의 전부다. 전기나 수도가 있을 리 없다. 그 아이의 부모는 낮에 농사를 짓고 밤에 라디오를 듣는다고 했다. 마당에서는 아이 둘이 닭, 고양이와 어울려 식사를 하고 있다. 아이들이 낯선 방문자에게 시선을 주는 순간, 고양이가 밥그릇을 날름 핥는다. 시골의 삶은 도시의 삶과는 많이 다른 듯했다.
털모자는 6월부터 시작되는 겨울을 따뜻하게 나라는 의미에서 준비한 이날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아이들의 머리에 모자를 씌워줄 때, 나는 왠지 모르게 경건해지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걔네들의 머리에서는 흙냄새가 났고, 뒤통수는 따뜻했다. 회사에서 ‘짠돌이’로 소문난 사진기자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결국 1대 1 결연을 약속하고 말했다. 자기 아들이 일곱 살이라면서.
13일-이 나라에 다시 올 일이 있을까요?
오고 가는 시간을 빼면 모잠비크에 온전히 머문 시간은 이틀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이 나라를 떠나는 마음이 평온하지 않다. 자꾸 뒤를 돌아보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겨우 이름만 알던 나라였는데 말이다. 이 낯선 나라에서 우리를 안내해준 이상범 유지문 선교사와 이별하는 시간이 자꾸 길어지고 있었다.
“제가 다시 이 나라에 올 일이 있을까요?”
“앞으로 반드시 또 오게 될 겁니다. 이 나라에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거니까요.”
그것이 우리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그들이, 그리고 그들이 보여준 아이들의 얼굴이 가끔씩 떠오를 것 같았다.
마푸토(모잠비크)=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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