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김혜림] 영악해진 남편들
1982년 서울. 그때 서울은 최루탄 연기로 눈물 마를 날 없던 시절이었다. 이맘때였던 것 같다. 삼청동 입구에서 오랜만에 대학 동창을 만났다. 한 잡지사에서 일한다는 그녀와 찻집에서 나눈 얘기 한 토막.
잡지는 마감 며칠 동안은 밥 먹을 틈조차 없을 만큼 바쁘다고. 그런 북새통을 겪고 집에 들어가도 그녀는 방실방실 웃는다고 했다. 결혼하고 맞은 첫 마감 때 남편의 위로를 기대하고 “힘들다”고 투덜댔더란다. “그럼, 그만둬! 뭣 때문에 다녀? 내가 벌어다주는 것만 갖고도 충분히 살 텐데….” 남편의 말씀이었다. 그녀는 그 이후로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남편 앞에서 절대로 힘들다는 내색조차 않는다고 했다.
2010년 서울. 북악산을 바라보며 세종대로 한복판에서 산책을 즐기는 시절이다. 지난 주말 ‘3일 황금연휴여서 도로가 막힌다’는 뉴스로 위안을 삼으며 컴퓨터를 켰다. 블로그 마실을 돌다 눈에 띈 한 토막.
‘주말마다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하느라 완전 짜증’이라는 하소연에 마음이 끌렸다. 남의 일 같지 않아 지난 이야기를 챙겨봤다. 결혼 5년차 30대 후반 맞벌이 주부로, 주중에는 거의 외식을 하는데 문제는 주말이란다. ‘쉬는 날만은 집 밥 먹고 싶다’는 남편 뒤통수에 대고 ‘휴일에는 나도 쉬고 싶다’고 옹알이한다는 그녀. 댓글이 주르륵 달려 있었다. ‘그 맘 나도 알죠.’ ‘남편들이란 ㅊㅊㅊ.’ ‘그냥 집에서 나가세요.’ ‘그래도 어째요. 우리가 참아야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정말 헷갈린다. 28년 전 친구처럼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라고 할까봐 눈치 보는 아내는 이제 없다. 하지만 가사노동은 여전히 아내 몫이어서 맞벌이 아내들은 힘들다. 지난 19일 부부의 날(21일)을 앞두고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를 봐도 그렇다. 남편 85.1%가 ‘여성이 직업을 갖는 게 좋다’고 답했다. 그런 남편들이 집안일은 나 몰라라 하고 있다. 맞벌이 아내는 가정관리와 가족 보살피기에 하루 평균 3시간 20분을 쏟았지만 남편은 37분에 그쳤다. 주말과 휴일에 하는 일을 보면 남편은 TV 비디오시청이 1위로 34.6%, 아내는 가사가 31.9%로 1위다. 남편 TV 보실 때 아내 열심히 일했다는 얘기다.
그러고 보니 남편들은 영악해졌다. 아내의 사회활동도 흔쾌히 받아들이고, 아들 선호 사상도 호기롭게 집어던졌다. 얼마 전 육아정책연구소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태어날 아이가 아들(28.6%)보다 딸(37.4%)이길 바라는 아버지가 더 많았다. 대신 이들은 아내의 벌이로 좀 더 안락한 생활과 사근사근한 딸의 재롱을 얻게 됐다. 결국 남편들은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짐과 대를 이어야 된다는 부담을 벗어던진 것 아닌가. 손해 볼 게 없다.
남편들이 가사노동 분담을 외면하는 것은 기득권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부엌에는 들어서지도 못하게 했던 그 시절 얼마나 평안했을까. 물 한 사발도 떠다 바치던 어머니, 아내, 딸을 기대할 수는 없어도 스스로 앞치마 두르고 주방엔 들어서기 싫을 터이다.
정말, 아까 그 블로거가 친절하게 답해 준 댓글이 하나 있었다. ‘애 낳아보세요 장난 아니에요.’ ‘예, 그래서 애는 안 낳고 있어요.’
출산 장려를 위해 낙태를 엄금하면서 ‘낙파라치’가 생겼다던가. 낙태가 불법인 게 언젠데 낙파라치가 새삼스럽게 등장한 것을 보면 예전에는? 아무튼 낙태 엄금보다는 남편가사활동 분담 운동이 출산장려에 더 효과적일 듯하다. 돈 벌고, 밥 하고, 애까지 보겠다고 나서는 여성은 점점 줄어들 테니까.
가사는 아내 몫이라는 고정관념. 변하지 않는 게 이것뿐이랴. 선거 때만 되면 거리를 점령하는 선거운동원과 촌스런 캠페인 송, 그리고 오가는 돈 봉투, 상대를 거침없이 헐뜯는 입…. 그리고 때맞춰 불어 주는 북풍. 21세기의 한국, 프레임은 바뀌고 있는데 콘텐츠는 여전히 20세기다. 그래서 우습고 슬프다.
김혜림 선임기자 ms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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