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60주년-문학으로 본 전쟁과 기억] 전쟁의 절망속 문학 꽃피운 부산 피난민촌 ‘바라크’
전쟁을 직접 체험한 문학 세대들은 모든 피난민들의 종착지였던 부산 ‘바라크촌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1·4후퇴를 전후하여 모여든 난민들은 부산 초량역 광장의 황량한 겨울에 몸을 맡겨야 했다. 부산은 한번도 전쟁을 직접 체험하지 않았지만 전쟁이 가장 잘 반영된 곳이었다. 이상한 가역 반응의 도시가 부산이었다. 관부연락선이 떠나던 부산항은 현해탄 임해도시로의 풍광을 드러낸 동시에 밤이면 용두산 언덕배기에 가득 찬 빈민굴 불빛 때문에 홍콩을 능가하는 빌딩정글로 오해되었고 그것이 다음날 정체를 드러냈을 때는 환멸에 치를 떨어야 했다.
황량하기 짝이 없는 용두산과 완월동 그리고 영도 초량 동래의 언덕은 바라크 지대를 이루었다. 그것은 피난민만의 거처가 아니었다. 서울에서 소개되어온 대학과 중고등학교도 가교사를 지어 밀집해있었다. 모든 게 임시였고 정부마저도 임시였다. 임시를 국가로 알고 살아가야 하는 하루하루는 환멸의 구렁텅이였다.
바라크 생활은 오물처리가 되지 않는 것은 물론 상수도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부산 자체가 거대한 바라크였다. 미국의 원조 물자에 섞여 들어온 킹사이즈의 구호 의류가 전선에서 죽은 자의 옷처럼 불길하게 널려 있었다. 모든 풍경이 극적인 위악으로 귀결되는 상황에서 문학인들은 가슴에 허무라는 두 글자만을 새기며 어떤 창작의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들은 바라크에서 바라크로, 술집에서 술집으로, 다방에서 다방으로 몰려다닐 뿐 전쟁을 객관화시킬 어떤 전망도 없는 난민 그 자체였다. 아침에 다방에 나가고 저녁이면 빈대떡을 먹는 게 일과였다. 금강 스타 르네상스 야자수 등의 다방이 있었고 그중에서도 밀다원은 김동리 황순원 조연현 이한직 이봉구 박기원 김환기 남관 김소운 조병화 박인환 등의 아지트였다. 다방의 날씨는 전선의 뉴스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들 가운데 시인 정운삼(1923∼1953)은 유난히 말이 없었다. 늘 구석자리를 지정석처럼 차지하고 붙박혀 있었다. 중공군이 부산까지 밀려들면 제주로 건너갈 수밖에 없다고 웅성대도 그는 혼자 침묵했다. 톱밥 난로 옆에서 잠깐 몸을 녹이고 다시 외따로 앉은 그가 이미 약을 삼키고 유서를 썼다는 걸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지금 나의 앞에는 나의 친애하는 벗들이 거의 다 모여 있음을 본다. 나는 그들이 나를 지켜주고 있는 이 시간 이 자리에서 더 나의 생애를 연장시키고 싶지 않다. 잘 있거라. 그리운 사람들. 정운삼”
예술파 시인 전봉래가 죽은 곳도 다방이었다. 그 죽음으로부터 바라크 문학이 태동되었으니 이들 전쟁 세대들의 문학은 유언의 문학이자 유서의 문학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전쟁과 피난생활을 통한 집요한 인간 굴절의 현상이 곧 전후 문학의 본질이었다.
정철훈 문화부장 chjung@kmib.co.kr
GoodNews paper Ϻ(www.kmib.co.kr), , , AIн ̿
Ŭ! ̳?
Ϻ IJ о
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