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60주년-문학으로 본 전쟁과 기억] 릴레이 인터뷰 ① 시인 고은

Է:2010-05-18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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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60주년-문학으로 본 전쟁과 기억] 릴레이 인터뷰 ① 시인 고은

“6·25란 안테나가 요즘도 불쑥 날 건드려”

1950년대는 단순히 숫자로 표기된 연대가 아니다. 연대기에 평면으로 붙어있는 숫자가 아니라 언제든지 살아 꿈틀대는 입체의 기억이 1950년대이다. 당시 한반도는 들끓고 있었다. 살육의 용광로였다. 총, 균, 쇠 그리고 고아와 정신 분열과 죽음. 그것은 근대에서 막 빠져나온 한국이라는 신생 국가의 임종에 버금가는 질환이었다. 각혈과 같은 그 증세는 언어로 스며들어 이 땅에 전후 문학 세대를 잉태하였고 피로 얼룩진 문학을 출산하였으니 폐허의 막장에서도 언어는 싹을 틔웠다.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전쟁 체험 문학인이 바라본 6·25전쟁의 의미와 파장을 진단한다.

“6·25알파는 6·25로부터 떨어져나갔는지 모른다. 오늘날 6·25는 그 전천후적 사변을 목격하지 않았거나 목격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중요시하지 않는 세대에 의해서 때때로 음화화하고 있다. 그것은 현실 밖으로 6·25의 의미를 거세시키는 일이다. 그 전쟁은 그러므로 화석이 되기 쉽다.”

고은(77) 시인은 1968년부터 2년에 걸쳐 잡지 ‘세대’에 연재했던 ‘1950년대’(도서출판 향연)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40여년전 그는 ‘6·25’를 주제로 원고지 2000매에 이르는 방대한 글을 마구 쏟아냈다. 자신이 목격하고 체험한 ‘6·25’를 어떤 식으로든 정리하지 못하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는 자괴감 같은 것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14일 녹음 짙은 서울대 교정에서 고은 시인을 만났다. 서울대 교양학부에서 개설한 금요 특별강좌의 석좌교수를 맡아 강의 준비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경기도 안성 자택을 떠나 외출할 때 쓰는 중절모가 머리 위에 얹혀져 있었다.

-6·25는 오늘에 와서 어떤 의미를 떠올리게 합니까.

“잘 닦인 식탁이라든지 네모 반듯한 물건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보면 기이감이 느껴지지. 그렇게 반듯한 물건에 잘 적응이 안되는 거지. 6·25때는 모든 사물이 뒤틀리고 찌그러지고 삐끄덕거렸으니까. 6·25때 겪은 원상의 힘은 너무 강하지. 고향이 고향 그 자체로서 해체되어 버렸다고나 할까. 고향 안에서 고향사람들끼리 서로 죽이는 참극이 벌어졌으니 고향이 아무 의미도 없어져버렸어.”

-‘기이감’은 요즘도 자주 느낍니까.

“그때는 어느 하나 온전한 것이 없었으니까. 뭔가 틀이 잡힌 온전성이란 찾아볼 수 없고, 상품이면 상품, 현상이면 현상들이 지금도 문득 기이하게 느껴질 때가 있지. 국내는 물론 외국에 나가서도 문득 기이감이 느껴지고. 해묵은 안테나가 불쑥 나와서 그걸 건드리는 거죠. 사과 괴짝처럼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지.”

-6·25 당시 또는 직후에 목격한 문단 상황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예컨대 옷이란 건 존재에 대한 절대 질감인데. 6·25때는 사람들이 미군 구호물자로 나온 구제품 옷을 입고 다녔는데 시인 박인환 같은 이가 그걸 즐겨입었지. 문인들이 모이면 구제양복을 걸치고 나오는데 양복 안쪽에 존슨, 브레들리 같은 이름이 미싱되어 있었어. 그걸 없애려고 손톱이나 이빨로 물어뜯기 일쑤였지. 그만큼 정체성이 불안했던 거야. 박인환 문학의 불안과 불완전은 그런 구제옷을 입은 상태와 상관이 있을거야.”

-부산에 임시정부가 자리잡았듯 모든 게 임시였고 미완이었다는 사실도 그런 불안과 관련된 것인가요.

“모든 사람들이 어떤 완결성을 갖지 못한 중퇴적 존재였지.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중퇴로 끝나버린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그의 시선이 벤치 옆에 수풀에 잠시 머물렀다. “꽃 필 때가 좋지. 6·25때는 꽃이 보이지 않았어. 꽃을 얘기하는 사람을 보면 아주 미웠어.”

그는 고향인 전북 군산에서 6·25전쟁 발발 소식을 들었다. 소식을 들었다고 하는 순간, 국토는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허무와 허탈감을 견딜 수 없는 나머지 그는 엿장수가 되어 떠돌았다.

“1952년에 군산을 떠나 통영으로 가자고 마음 먹었지. 그때는 며칠 만에 한번씩 부정기적으로 기차가 다녔는데 기차 앞 뒤로 기관총을 고정시켜놓고 군인들이 전후를 살피고 있었어. 산에 숨어 있던 빨치산들의 기습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인데 미국 서부 활극을 보듯, 그런 식이었어. 기차를 타고 여수까지 와서 한려수도 뱃길로 통영에 건너가야 하는데 뱃삯이 없어 구걸하다시피해 배를 탈 수 있었어.”

고은은 그길로 입산해 세상을 등졌다. 아니 그의 입산 결심이야말로 가장 적극적으로 세상과 맞서려 했던 행위였는지도 모른다. 세상이 전쟁을 치르는 동안 그는 자신과 전쟁을 치렀던 것이다.

“니체는 전쟁찬미주의자야. 그 점에서 평화론자보다 더 솔직한 사람이지. 시는 본래부터 평화지향적인 것이지만 한편으로 세상이 전쟁사로 채워졌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지. 전쟁은 일종의 인류사의 리듬 같은 것일지도 몰라. 저기압 상태에서 번개가 일어나 대기를 정화하고 청소하는 것처럼 유사 이래로 전쟁은 인류를 어느 만큼 죽이고, 살아남게도 하고,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것 같아.”

그는 일주일 전에 걸린 감기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지독하다고 했다. 전쟁 얘기 중에 감기가 섞여들었다.

“이 감기는 내가 어떤 시대에 사느냐를 알려주는 아주 매운 고뿔인 것이지. 6·25때는 전쟁의 시대라는 걸 알려주는 병이 폐결핵이었어. 내가 그렇게 걸리고 싶었던 폐결핵에 안걸린게 가장 억울한 일일거야.”

6·25때는 폐결핵에 걸려 각혈을 하며 시를 쓴다는 게 시대의 고통과 본질적으로 합일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의 시인들에게 폐병은 ‘이제야 각혈시인이 되었구나’, 하는 비장미를 주는 훈장같은 질병이었다.

“오죽했으면 화가 이중섭이 일본에서 살다가 귀국해서 일본의 우거진 숲보다 6·25로 인해 짓이겨진 우리의 민둥산과 초토가 더 좋다고 했을까. 폐허가 인간이라는 존재 행위의 외부만이 아니라 내부로 자리 잡은 것이야. 내 문학의 출발이 폐허인 것이지. 폐허는 내 문학적 태생과 결부되어 있지. 폐허가 내 문학의 고향이야.”

그는 강의 시간에 맞춰 강연장으로 이동하면서 문득 녹음으로 우거진 관악산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저 초록을 보게나, 죽으면 못 보네.”

대담:정철훈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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