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의 속도 자전거의 속도 인생의 속도… 남한강 4박5일 자전거캠핑

날이 저문다. 봄 햇살을 하얗게 튕겨내던 강물의 은색이 거무스름해지고, 주변 산들의 발랄한 녹색이 무거워지는 시간, 남한강변에 자전거를 뉘고 랜턴을 켠다. 둥그렇게 늘어선 1인용 텐트들 사이에서 “쉬익 쉬익” 버너로 밥하는 소리가 난다.



낮

야영 이틀째. 10일 하루 동안 50㎞를 달렸다. 도담리(충북 단양군)에서 금성면(충북 제천시)까지 남한강 물줄기를 따라 자전거를 굴려 왔다. 자전거는 9일 아침 서강과 동강이 만나 남한강이 시작되는 청령포(강원도 영월군)에서 처음 출발했다.

자전거는 사람이 가는 길이라면 다 간다. 자동차가 못 가는 길을 다 갈 수 있다. 그래서 자전거여행은 새로운 여행이다.

“차로는 못 보는 아름다움을 많이 봐요. 차를 타면 눈으로만 보잖아요? 자전거를 타면 온몸으로 풍경을 느껴요. 그동안 보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만나게 되는데,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되죠.”

49세 주부 이서윤씨의 말이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사는 그는 가족을 떼놓고 혼자 왔다. 이씨는 자전거여행 동호회 ‘쇠말패’ 회원이다. 쇠말패는 자전거캠핑 문화를 개척하고 있다. 캠핑이라면 으레 ‘오토캠핑’(자동차에 장비를 싣고 떠나는 캠핑)을 떠올리지만, 이들은 자전거캠핑을 고집한다. 최소한의 짐만을 챙겨서 자전거에 싣고 짧게는 1박2일, 길게는 1주일씩 자전거캠핑을 떠난다.

쇠말패 회장 박규동(65·경기도 포천시 소흘읍)씨는 “자전거에 트레일러(짐수레)나 패니어(짐받이)를 달면 의식주 모두를 해결하면서 멀리 갈 수 있다”며 “자전거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자전거캠핑에 도전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박씨는 지난해 여름 부인과 함께 45일간 전국을 돌며 자전거캠핑을 했다.

자전거 트레일러에는 최대 50㎏까지 짐을 실을 수 있다. 자전거로 그 무거운 수레를 어떻게 끌까 싶겠지만, 여성들도 트레일러를 달고 고개를 넘는다. 쇠말패 회원들은 텐트는 물론 압력밥솥까지 넣고 다닌다. 압력밥솥으로 밥을 하면 코펠로 하는 것보다 빠르고 맛있게 된다.



밤

해가 떨어지면 길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풍경으로 가는 길이 닫히고 나면, 마음으로 가는 길이 새로 열린다. 달빛을 받아 강물 색깔은 은은해지고, 하늘은 별 천지가 된다. 강물을 끼고 별들을 이고 랜턴 불빛들이 모이고, 그 따뜻한 불빛 속에서 환한 웃음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온다. 마음으로 가는 길도 풍경으로 가는 길과 똑같다. 그 길에는 언제나 놀라운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

하나둘 자기 텐트로 돌아가면 두 사람이 남는다. 둘이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에 빠져든다. 야외에서 잔다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인공의 조명과 소음이 없는 완벽한 적막. 나와 풍경 사이에 있는 건 얇은 천 한 조각뿐이다.

그러나 야영의 진정한 기쁨은 아침에 발견된다. 빛의 기척에 눈이 떠져서 텐트를 열면, 막 세수를 마친 어린애 얼굴처럼 깨끗한 풍경이 펼쳐진다.

“지난 2월 눈밭에서 텐트를 치고 잤어요. 아침에 일어났는데, 여태껏 내가 맞이한 아침은 아침이 아니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텐트를 열고 바깥으로 나왔을 때,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날 것 그대로 다가오는 느낌, 자연과 나의 경계가 사라진 느낌, 그냥 내가 자연의 일부가 된 듯한 느낌이었어요.”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40세 여교사 박언진(포천시 소흘읍)씨는 텐트에서 맞이한 아침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 역시 혼자서 이번 여행에 참가했다.

해가 동쪽 봉우리 위로 얼굴을 내밀면 물빛이 다시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햇빛이 살아나면 라이더의 몸도 뜨거워진다. 몸 속 세포 하나하나에 기운이 차는 것을 느낀다. 텐트 위에 맺힌 물기가 마르기를 기다리며 아침밥을 짓는다. 먹어야 또 달릴 수 있다.



아침

봄 흙이 발갛게 부풀었다. 나무 이파리들은 수줍은 녹색이다. 그것들 사이로 남한강이 흐른다. 강이 수평으로 흔들리며 직진하는 것이라면, 강을 쫓아가는 도로는 수직으로 출렁거린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수없이 반복하며 간신히 따라간다.

오르막길에서 자전거는 쉴 수가 없다. 땀이 후두두 떨어지고, 다리 근육은 터질 듯 팽팽한데, 페달질을 멈추면 안 된다. 길은 가장 가혹한 지점에서 방향을 틀고 슬그머니 어깨를 낮춰준다. 그렇게 자전거를 넘겨준다.

오르막을 오르는 동안 호흡은 갈수록 짧고 빠르고 격렬해진다. 마침내 꼭대기에 서면 호흡이 툭 터진다. 그리고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뺨에 닿으며 내리막길의 쾌감을 예고한다. 올라갈 때는 땀으로 샤워를 하고, 내려갈 때는 바람으로 샤워를 한다. ‘바람샤워’는 온몸을 얼얼하게 만들 정도로 차고 짜릿하다.

내리막길에서 자전거의 속도는 놀랍다. 시속 50∼60㎞가 된다. 풍경에 시선을 줘선 안 된다. 전방의 진로만 주시하면서 자전거와 몸을 일치시켜야 한다. 그때 자전거는 한 마리 새처럼 활강한다. 라이더들은 내리막길이 주는 짧은 순간의 쾌감에 중독돼 있다. 그들은 그것을 ‘내리가즘’이라고 부른다.

자전거는 거리를 접으면서 전진한다. 오르막길에서 자전거는 답답할 정도로 느려지고, 내리막길에서 무서울 정도로 빨라진다. 그렇게 거리를 늘렸다 줄였다 하면서 나아간다.

강원도 영월에서 서울시 중랑천까지 가는 쇠말패의 ‘4박5일 남한강 자전거캠핑’에는 7명이 동행했다. 교사, 주부, 회사원, 자영업자 등 직업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른 이들이다. 직장에 휴가를 내거나 가게를 맡기고 합류했다. 인천시 송도동에서 온 정명석(53·자영업)씨는 “내가 먹는 물이 어디서 시작해서 우리 집까지 오는지 보고 싶었다”며 이번 여행에 참가한 이유를 설명했다.

“남한강이 우리나라에서 굉장히 중요한 강이에요. 남한 인구 절반이 남한강 물을 먹을 거예요. 서울시와 경기도 주민 전부가 먹으니까. 그 강이 어떻게 흐르는지 직접 보고 싶었어요.”

강은 풍경을 이룰 뿐만 아니라 생활의 터전을 이룬다. 강물을 끌어다 먹고 농사를 짓는다. 자전거는 아득하게 긴 강을 찬찬히 바라보는 좋은 방법이 된다. 올해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다는 회계법인 상무 김세식(58·경기도 구리시 교문동)씨는 “강물의 속도와 자전거의 속도가 비슷한 것 같다”고 말했다.

“걸어서는 물을 못 따라가요. 그런데 자전거는 물을 따라서 함께 흘러갈 수가 있어요. 강물이 가는 것처럼 인생도 흘러가잖아요? 강을 따라 가면서, 강변에 깃들어 잠을 자면서, 강물처럼 흘러가는 자기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돼요.”

일행은 나이가 많다. 대다수가 50세 이상. 60세를 넘긴 이도 2명이나 된다. 젊은 시절부터 산을 좋아했다는 자영업자 권병기(62·경기도 의왕시 내손동)씨는 “나이가 들어 가면서 자전거가 더 좋아진다”며 “무엇보다 자전거의 그 적당한 속도가 좋다”고 했다.



저녁

금성면에서 동량면(충북 충주시)까지 남한강을 따라 가는 길은 인적이 드물고 아름답다. 그러나 자전거로 넘어가는 그 길은 한가롭지 않다. 크고 작은 고개들이 끈질기게 달라붙어서 다리 힘을 빼놓는다. 인가마저 드문 그 길에 상점이나 식당이 있을 리 없다. 급한 대로 라면을 끓여 먹으며 힘을 보충할 수밖에. 충주호를 도는 532번 비포장 지방도를 빠져나오는 데 거의 하루를 보냈다. 11일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점심 먹은 1시간을 빼고 꼬박 9시간을 안장 위에서 보냈다. 66㎞를 달렸다.

전날보다 험한 코스였지만 더 멀리 달릴 수 있었던 것은 별다른 사고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행은 늘 예상치 못한 사고를 동반하게 마련이다. 트레일러가 빠지기도 하고, 카메라를 잃어버리기도 하고,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배터리가 방전되기도 한다. 문제가 생기면 동행자가 다 달라붙어 풀어낸다. 해결하지 못하면 나아갈 수가 없다. 그렇게 일행은 친구가 된다.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어도 멀리 못 가고, 여럿이 가면 빨리 못 가지만 멀리 갈 수 있다, 이런 말이 있어요. 진짜 그래요. 이 사람들과 같이 오지 않았다면 남한강을 어떻게 다 달릴 수 있겠어요.”

방송국에서 촬영감독을 하는 박정옥(57·서울 신도림동)씨가 말했다. 그도 올해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다.

햇빛이 사위면 몸도 식는다. 풍경이 사라지면 근육의 힘도 빠져나간다. 바람과 햇볕, 흙과 물의 냄새, 녹색, 이런 것들의 힘은 대단하다. 그것들이 아니라면 어떻게 달려왔을까.

또 저녁이다. 다시 마음의 시간이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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