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김승렬] 카틴 숲 사건과 러시아-폴란드

Է:2010-05-10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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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김승렬] 카틴 숲 사건과 러시아-폴란드

지난달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과 고위 인사들이 카틴 숲을 방문하려다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서 70년 전 ‘카틴 숲 학살’이 다시 한번 세계 언론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1990년 소련 정부는 사건의 주모자가 스탈린임을 밝히고 이에 대해 폴란드인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하지만 구 공산당 계열의 인사들은 폴란드가 1920년 소련을 침공했고, 6만명의 러시아 전쟁포로가 폴란드 감옥에서 숨진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정부의 사과 조치를 비판했다. 6만명이라는 숫자는 정확하지 않지만 이들의 주장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와 폴란드 두 나라 갈등의 역사는 짧게 잡아도 500년 가까이 되지만, 직접적 계기는 18세기 말 시작된 러시아의 폴란드 지배였다. 이것은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어 폴란드가 독립할 때까지 약 120년간 지속됐다. 물론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이에 동참했지만 러시아가 차지한 영역이 가장 넓었다.

폴란드도 한때는 가해자

러시아의 폴란드 지배는 정치경제적 침탈뿐 아니라 학교에서 폴란드어 사용을 금지하는 등 참혹한 문화말살 정책을 수반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많은 폴란드인이 서유럽이나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다는 사실은 러시아의 식민 통치가 가혹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러시아 혁명과 1차대전 종전은 폴란드에 복수의 기회를 제공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과 연이은 내전으로 러시아는 분열되어 옛 영토 전체를 통제할 수 없었다. 볼셰비키 러시아는 1918년 봄 독일과의 강화 조약을 통해 발트 국가들 즉 우크라이나, 벨로루시를 독일에 할양해야 했다. 그러나 1918년 11월 독일이 1차대전에서 패하자 볼셰비키 러시아는 조약 파기를 선언하고 독일에 할양한 지역을 되찾을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1919년 봄, 협상국 진영은 볼셰비즘이 유럽에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러시아 주위에 안전지대를 설치하고 그 중심에 부활한 폴란드를 두었다. 폴란드는 1920년 4월 무인지대와 같이 되어버린 우크라이나로 진격해 들어갔다.

사실 우크라이나는 16∼17세기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의 영토였으니 폴란드인들은 이 전쟁을 고토 수복 전쟁이라 생각했다. 폴란드는 1921년 3월 리가 조약을 통해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의 상당 부분을 얻었다. 러시아 구 공산당 계열의 인사들이 주장하는 6만명 학살은 바로 이 때의 일이다.

2차대전 발발은 거꾸로 소련에 보복의 기회를 제공했다. 독일과 소련은 또 한번 1940년 폴란드를 분할 점령했다. 붉은 군대는 수십만명의 폴란드 군인, 경찰, 교수, 의사 등 폴란드 엘리트를 포로로 잡아 소련 수용소에 수감했다. 심사를 거쳐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 출신, 소비에트에 적대적이지 않은 자들을 제외하고 모두 처형했다. 그 수가 무려 2만명이 넘는다. 살해된 자 일부가 카틴 숲에 매장됐다. 이들은 20년 전 붉은 군대를 격파하고 학살한 주범들이었다.

민족 갈등 악순환 끊을 때

소련에 끌려간 폴란드 군인의 행방에 대한 관심은 나치 독일이 1941년 6월 소련을 공격하면서 갑자기 부상했다. 폴란드 망명정부와 소련은 나치 독일과 싸우기로 하고 소련 땅에 폴란드군을 창설하기로 했다. 이때 폴란드 망명정부는 소련에 끌려간 폴란드 장교들의 소재를 물었다. 스탈린은 모든 폴란드인을 석방했으며 이들이 만주로 갔기 때문에 행방을 정확히 모른다고 거짓말했다.

카틴 숲 학살 70주년 추모제를 지내러 가다 사고로 사망한 대통령은 러시아에 비판적인 정치세력을 대변하고 있었으니 70년 전 스탈린에 의해 도발된 카틴 숲 학살과 겹쳐지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이런 역사의 반복이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민족주의와 이데올로기 갈등이 줄어든 이제는 러시아와 폴란드 민족 갈등의 악순환 고리를 끊을 때다. 다행스러운 건 이번 참사로 양국 관계가 악화될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김승렬 경상대 교수(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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