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 시인 네번째 시집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긴 호흡으로 그린 북방 대륙
과거·현재 넘나든 시간여행
시와 소설을 넘나들며 역사와 시대를 다루어온 정철훈(51) 시인의 네번째 시집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창비)는 막연히 시적인 것들로 알려진 형식을 일거에 파괴하면서 산문의 긴 호흡으로 강건한 대륙성을 과시하는 과감성이 돋보인다. 나아가 보이는 역사(현재)와 보이지 않는 역사(과거)를 통합하려는 시간성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이동휘 홍범도 박진순 김아파나시 홍도 김규식 여운형/이 역을 지나 뻬쩨르부르그에 당도했을 이름들/동방피압박민족대회가 열린 1920년/피압박이라는 단어에서 구시대의 유물처럼 녹냄새가 난다 //(중략)//외로운 급수탑 하나가 모든 이야기의 중심으로 서 있던/해 지기 십분 전/열차는 식당칸의 접시들을 달그락거리며 미끄러져갔다(‘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일부)
광대한 대륙의 풍광 속에서 구현되는 이러한 통합의식은 개인의 실존적 고독, 그리고 여러 모순이 존재하는 시대 의식과 결합해 인간의 고독과 방황을 탁월하게 형상화한다.
“로맹 가리를 읽는 밤에 비가 내린다/번역본 ‘그리스 사람’을 읽는 밤/그러니까 밤비가 무언가를 번역하는 몸짓으로 느껴진다/밤비가 번역하는 것이 불귀(不歸)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나는 눈치챈다”(‘로맹가리를 읽는 밤’)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내야하는 일상에서 비롯되는 고독은 그의 시가 빚어지는 출발점이지만 시인은 고독의 근원을 캐내듯 시속에 수많은 인물들을 출몰시킨다. “낮에는 보험회사 직원/밤에는 글 쓰는 고독한 작가/(중략)/보험회사 직원이 2라면 작가가 8일거라는 생각/밥벌이와 영혼의 관철이 2대 8일 거라는/생각의 연장이 카프카의 사진이다(‘카프카의 가르마’ 부분)
카프카, 로맹 가리, 시인 김수영과 백석, 북한 묘향산 부근의 멱 감는 아이들, 시베리아 철도를 건설했던 러시아 여성들, 피맛골의 껌파는 노파 등등. 이들은 시를 매개로 하여 시대를 넘나들지만 실상 이들은 시간 여행자로서 시인 자신의 대역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언덕길을 내려오면서 나는/나귀를 타고 일없이 왔다갔다하고 싶다 했던 백석을 떠올린다/백석이 쓴 ‘마포’라는 산문도 떠오른다/(중략)/올라갈 때 김수영, 내려올 때 백석/이만하면 뱃심이 딴딴해진다”(‘도화동 언덕길’ 일부)
과거와 현재를 통합하려는 이러한 태도는 한 개인이 겪는 일상의 역사적 배후를 규명하는 탐구 정신과 맞물린다. 과거와 현재를 하나의 풍경으로 섞어버림으로써 역사의 보편성 내지 실존의 본질을 치열하게 탐구하는 이같은 방식은 탈역사 시대를 선언하고 저만치 달아나고 있는 포스트모던에 대한 반성으로도 읽힌다.
그가 ‘뻬쩨르부르그’라고 말할 때 그건 북방의 특정 장소일 뿐 아니라 현재적 회한과 상처로 점철된 다분히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장소를 지칭하는 것이 된다. 시인은 끝없이 펼쳐진 툰트라의 밤을 가로지르는 마지막 열차의 승객이자 시의 화자(話者)로서 운명 지워진다. 출발지에서는 마지막 열차지만 도착지에서는 새벽에 당도할 첫차일 것이니 시인은 시간적 배열의 동선을 시대별 인물들로 점묘하는 독특한 화법으로 시집을 채색하고 있는 것이다.
거칠 것 없이 토해내는 열정의 독백들을 읽다보면 정철훈의 시들은 지금 어떤 정점에 이른 듯 작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라동철 기자 rdch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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