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수의 영혼의약국(54)
냉장고 비우기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진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님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랭이 타오르것다.
-이수복의 시 '봄비'-
누군가 봄비에는 ‘일인칭 고독’이 흐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제 가늘게 내리던 봄비는 온 종일 고독하게 대지를 덮고 있었습니다. 만약, 어제 까닭모를 고독에 휩싸여 지내셨다면 그건 모두 봄비 탓입니다. 봄비는 고독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는 중에 사람의 마음이며, 생각, 기억의 새순을 돋게 하니까요. 어디 그뿐입니까? 마당가 한갓진 곳에 냉이며, 민들레, 고들빠구(강원도 사투리), 상사화의 새싹을 밀어올리기도 하잖아요.
아침에 마당가에 나갔더니 벌써 새 얼굴들이 가득했습니다. 녹슨 호미를 찾아들고 집 주위를 한 바퀴 돌았을 뿐인데 바구니 가득하게 봄나물이 담겼습니다. 나물을 씻고 다듬는 손이 빨개졌습니다. 아직 물은 시리고 찹니다. 다듬은 봄나물을 냉장고에 넣으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더니 거긴 여태 겨울입니다. 새로 태어난 냉이나 고들빠구를 거기 넣어두려니 괜히 슬퍼졌습니다. 아니, 새로 태어난 그들이 슬퍼할 거 같았지요. 어떻게 할까? 냉장고에 넣으려던 봄 생명들을 다시 널따란 양푼에 담아 물을 채워 뒤란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겨울 냉장고, 꽁꽁 얼어서 겨울일 뿐만 아니라 굳고 검은 것들로만 채워진 냉장고에 봄을 섞기 이전에 깨끗이 비우는 것이 우선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부터 냉장고가 완전히 비워질 때까지, 냉장실이거나 냉동실에 있는 온갖 것들을 완전히 먹어서 텅텅 빈 다음에야 장을 보고, 새로운 양식들을 냉장고에 넣을 것인지를 생각하겠다는 거지요.
금년에 내가 맞는 봄은 이렇게 냉장고 비우기로 시작됩니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라”(마 10:38)시던 예수님의 말씀이 ‘1인칭 고독이 흐르는 봄, 아침’입니다.
<춘천 성암감리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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