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과 성찰’ 통해 어머니를 그리워하다
의사 서홍관 세번째 시집 ‘어머니 알통’
“나에게도 꿈이 하나 있지.//논두렁 개울가에/진종일 쪼그리고 앉아//밥 먹으라는 고함소리도/잊어먹고//개울 위로 떠가는/지푸라기만/바라보는//열다섯 살/소년이 되어보는.”(‘꿈’ 전문)
의사이자 시인인 서홍관(52)의 시는 담백하다. 멋을 부리지도 않고, 감정을 과도하게 드러내지도 않는다. 그저 대상을 응시하고 회상하면서 내면의 느낌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그래서 그의 시는 편안하게 다가오지만 그 속에는 뭔가 느꺼운 울림이 있다. 보통 사람들의 삶이나 생각을 가공하지 않고 그만의 색깔로 녹여내는 게 그의 시가 갖고 있는 힘이다.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어머니의 알통’(문학동네)이 나왔다. 두 번째 시집을 낸 게 1992년이니 무려 18년만이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저 세상으로 떠난 어머니에 관한 단상들을 정성스레 담아냈다. 자서(自序)에서 “어머니를 어머니로 만난 것이 내 인생의 첫 번째 행운이었다”고 밝힌 것처럼 어머니는 그의 시는 물론 삶의 원천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들은 애틋하다.
“일흔일곱이 되신 어머니는/고속버스 기사가/다시는 이렇게 싣지 말라고/지랄지랄하더라면서/화가 나셨다./보따리 열네 개를 들고 오신 날.//어머니 상경하실 때는/아들 주시려고/동치미 국물과 김치와 깻잎과 무를 가져오시고”(‘보따리 열네 개’ 중에서)
“나 아홉 살 때/뒤주에서 쌀 한 됫박 꺼내시던 어머니가 갑자기/“내 알통 봐라” 하고 웃으시며/볼록한 알통 보여주셨는데.//지난 여름 집에 갔을 때/냉장고에서 게장 꺼내주신다고/왈칵 게장 그릇 엎으셔서/주방이 온통 간장으로 넘쳐 흘렀다.//손목에 힘이 없다고,/이제 병신 다 됐다고,/올해로 벌써 팔십이라고.”(‘어머니의 알통’ 전문)
담담한 고백 속에는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진하게 묻어있다. 나아가 그 담담함으로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모든 것은 마지막이 있고, 그래서 삶이 오히려 가치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는 어머니를 묻던 날 “어머니가 무릎에 내 머리를 올려주고/성냥개비로 살살 귓밥을 파주시던 그때”를 떠올리며 “조카들과 농담도 하고 웃으면서” 산을 내려올 수 있었다고 썼다.
그의 시편들을 두고 “맑고 평안한 고백과 성찰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서정시의 오래된 본령과 만나게 해준다”는 문학평론가 유종호의 말은 적확한 지적이다. 시인의 시선은 자신의 환자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웃 등 외롭고 쓸쓸한 존재들에게도 열려 있다.
“군산 앞바다 선유도에서 일산까지/암 진단 받으러 오셔서/(중략) 오월의 훈풍이 마침 불어/김부귀씨 머리칼을 흩날리다가/다시 못 올 시절로/구름만 몰고 간다.”(‘김부귀씨’ 중에서)
“온종일/기계만 보고 살죠.//십팔층 빌딩 전체의/전기, 환기 시설 점검하는 일인데//지하에서/라디오 하나 켜고/깜박이는 불빛들을 들여다보는 게 일이죠.//(중략) 죽을 것같이 답답해서/어디로 멀리/도망갔으면 좋겠어요.”(‘이상수’ 중에서)
그는 뼈만 남아 울 힘 조차 없어 보이는 북한 어린이들의 모습에 안타까워하고(‘북한 어린이 비디오’), 철거민들의 기구하고 질긴 삶을 그려내고(‘사당동 산 24번지 철거민’), 과잉경쟁으로 치닫는 교육을 걱정한다(‘취학통지서’),
시인은 시집의 말미에 “세상에는 고통이 넘쳐난다”며 “시인은 시대를 증언하고, 시대의 고통을 노래하고 희망을 말해야 한다”고 적었다.
1985년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온 ‘16인 신작시집’에 ‘금주 선언’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시인은 경기도 일산 국립암센터에 재직 중인 의사로 여러 문인들의 ‘주치의’ 역할을 해 왔다.
라동철 기자 rdch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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