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도 바람에 봄처녀 청보리의 춤잔치… ‘제주 가파도 올레길’

Է:2010-04-21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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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도 바람에 봄처녀 청보리의 춤잔치… ‘제주 가파도 올레길’

암소 뿔이 오그라질 정도로 거세다는 가파도 바람이 드넓은 청보리밭을 빗질한다. 아침 햇살에 젖은 황금색 청보리가 짙푸른 가파도 하늘 아래서 한바탕 춤잔치를 벌인다. 가장 낮은 섬에서 날아오른 까치 몇 마리가 가장 높은 한라산을 향해 날갯짓을 한다. 고흐가 파리 교외의 한적한 시골마을 오베르 쉬르 와즈에서 그린 ‘까마귀 나는 보리밭’이 이런 풍경이었던가. 가파도의 깊고 푸른밤에서 깨어난 올레꾼들이 꿈꾸듯 청보리밭 사잇길을 걷는다.

“가파도 올레길은 그동안 제주올레길을 걷느라 수고한 올레꾼들에게 주는 작은 선물입니다. 이곳에서는 오름을 숨가쁘게 오를 일도 없고 5∼6시간씩 땀을 흘리며 걸을 일도 없어요. 청보리밭 사잇길을 산책하듯 한두 시간 천천히 걸으며 생각도 하고, 여유도 즐기는 휴식의 길로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한 에너지 충전소입니다.”(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사람들은 대한민국 최남단 마라도는 알아도 가파도는 잘 모른다. 가파도는 제주도의 모슬포항과 마라도 중간에 위치한 섬 속의 섬. 파도가 심해 가파도(加波島)라는 이름을 얻었다. 척박한 환경 탓에 젊은이들은 떠나고 늙은 해녀들만 남은 가파도에 올레꾼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지난달 28일 가파도의 속살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제주올레길 10-1 코스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서울 여의도 면적의 5분의 1 가량에 불과한 가파도는 가오리 모양의 납작한 섬으로 멀리서 보면 가랑잎이 떠있는 형상이다. 그 흔한 오름이나 언덕조차 없어 파도가 심한 날에는 섬이 물에 잠겨버릴 듯 위태로워 보이지지만 섬은 늘 어머니의 품처럼 넉넉하고 포근하다.

가파도 올레길은 선착장이 위치한 상동포구에서 시작된다. 숲에서는 숲을 보지 못하듯 제주도 본 섬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은 가파도에서 볼 때 가장 아름답다. 푸른 바다 너머로 서귀포, 한라산, 산방산, 송악산, 수월봉 등 제주도의 시리도록 푸른 풍경이 파노라마로 한눈에 들어온다.

모슬포항과 가파도 사이의 바다는 조류가 빠르기로 소문난 해협. 바람이 잔잔한 날에도 이곳의 파도는 배를 집어삼킬 듯 하얗게 부서진다. 1653년에 폭풍우로 제주도까지 떠내려 왔던 하멜 일행은 이 해협을 지나다 난파해 산방산 앞바다에 표착했다. 현대식 여객선이 5.5㎞ 길이의 직선항로를 두고 멀리 에둘러 오는 이유다.

다부진 체격의 서동철(51)씨가 앞장을 섰다. 발이 부르트도록 제주도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올레길을 개척하는 그의 직함은 제주올레 탐사대장. 올레길을 창안한 서명숙 누나의 순수성을 지켜주고 싶다며 사재까지 털어 소통의 길을 만들었다. 그동안 헤어진 등산화만 10여 켤레가 넘을 정도다.

자신이 그린 푸른 화살표를 따라 걷던 서동철씨가 올레길 주변의 돌을 가리킨다. 종달리 등 제주도 본 섬에서 보던 구멍이 숭숭 뚫린 검은 현무암이 아니다. 단단하면서도 붉은 기운이 감도는 가파도 돌은 하나하나가 수석이나 다름없다. 어떤 돌은 블루 코너로 불리는 가파도 심해의 산호를 닮았고 어떤 돌은 육지의 오석처럼 검고 단단하다. 가파도에는 이처럼 잘생긴 돌이 발에 채일 정도다. 집을 보듬은 돌담과 청보리밭을 둘러싼 밭담, 그리고 무덤을 품은 산담도 모두 이런 수석들이다.

해안선과 함께 걷던 올레길은 마라도가 보이는 냇골챙이 정자에서 청보리밭으로 들어간다. 가파도의 청보리밭은 17만평으로 섬 전체 면적의 60∼70%를 차지한다. 한라산에서 불어온 바람이 청보리밭을 빗질하듯 휩쓸고 지날 때마다 보리이삭이 연신 허리를 굽힌다. 청보리가 물결치는 맥랑이 하멜을 표류시켰던 가파도 앞바다의 파도처럼 격렬하다.

가파도의 청보리밭은 노란색 유채꽃과 보라색 갯무꽃으로 인해 더욱 환상적이다. 초록색 청보리밭을 캔버스 삼아 노란색과 보라색 꽃이 서로 뒤엉킨다. 추억을 찾아 나선 울긋불긋한 차림의 올레꾼들이 직선과 곡선을 그리는 보리밭 사잇길에서 아득한 꽃멀미를 경험한다. 동행했던 재즈기타 뮤지션 차야성(63)씨가 기어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서울의 아내와 딸에게 전화를 했다. 그가 가파도로 이사 오는 것에 대해 허락을 받는 데는 결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파도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기록상으로는 1842년에 가파도가 국유목장으로 조성되면서 사람이 거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청보리밭 곳곳에 위치한 56기의 남방식 고인돌은 가파도의 역사를 선사시대로 거슬러 오르게 한다.

‘아침이면 붉은 해가 바다에서 뜨고 / 저녁에도 붉은 해가 바다에 지는 / 가파도는 남쪽 바다 외딴 섬이나 … // 보이는 건 넓고 넓은 하늘과 바다 / 일년 내내 바닷바람 세차게 불어 / 나무들도 크지 못하는 작은 섬이나 …’

청보리밭 한가운데에 위치한 가파도 유일의 학교인 가파초등학교 교가다. 가파도의 삶이 얼마나 척박하고 외로웠으면 교가마저 가파도의 열악한 환경을 노래하고 있을까. 한때 200여명이 다니던 가파초등학교의 학생수는 현재 10명 안팎. 평일인데도 학생들의 그림자조차 찾아보기 힘들어 교정은 쓸쓸하기 그지없다.

제주도 해녀들은 가파도 해녀의 물질 실력을 으뜸으로 꼽는다.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고 조류의 흐름이 빠른 곳에서 작업을 하기 때문이다. 가파도 주민 130여 명 중 60여 명이 홀로 사는 할머니 해녀인 가파도에서 강수자(51)씨는 젊은이에 속한다. 지금도 바다가 무섭다는 그녀는 벽화골목이 아름다운 하동마을에서 해녀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민박집 ‘해녀촌’을 맡고 있다.

생계를 위해 초등학교 5학년 때 물질을 시작한 그녀가 잠수복을 입고 바다에 몸을 던질 때면 한 송이 검은 수선화로 피어난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가파도를 찾은 영화감독의 눈에 띄었다. 물질하며 홀로 세 자녀를 키우는 그녀의 기구한 삶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의 숨소리를 주제로 한 영화 ‘숨비’의 주인공으로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녀가 살아온 이야기들은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가파도 해녀들의 삶을 대변한다고나 할까.

해발 고도가 20.5m에 불과한 가파도에서는 집도 낮고, 돌담도 낮고, 무덤도 낮다. 대한민국 유인도 중 가장 낮은 가파도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을 우러른다. 사람들이 저 높은 곳을 향하여 한라산을 오를 때 가파도는 바다에 바짝 엎드려 자신을 낮추는 겸양의 미덕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다.

가파도의 깊고 푸른 밤은 올레꾼들이 오후 4시25분 마지막 여객선을 타고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에 시작된다. 태평양이 검은 갯바위와 함께 활활 타오르다 사그라진다. 이어 별빛이 초록 물결이 넘실대는 청보리밭에 쏟아진다. 가파도의 깊고 푸른 밤이 연출되는 순간이다.

가파도(제주)=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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