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홍은혜 (6) 오전에 대학 졸업, 오후엔 결혼식 올려
결혼은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지금이 아니면 음악공부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고민 끝에 손원일씨에게 편지를 썼다.
“저는 결혼보다 공부를 마치고 싶습니다. 졸업까지 3년을 기다려 주신다면, 약혼을 먼저 하겠습니다.” 어렵게 내린 결단이었다. 그런데 회신은 의외로 빨랐다. “그토록 공부가 하고 싶으면 해야지요. 당연히 기다리겠습니다.”
졸업식 날이 곧 결혼식 날이었다. 1939년 3월 11일 오전 10시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하고, 그날 오후 2시 결혼했다. 그때 내 나이 22세, 남편은 30세였다.
신혼살림은 넉넉지 않았지만, 궁핍하지도 않았다. 결혼 전부터 매형과 함께 서구 신상품을 취급하는 상점을 운영해온 남편은 사업가로 소질을 보였다. 서울 혜화동에 신혼집을 마련하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살았다. 어머니는 문득문득 남편인 손정도 목사님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보이셨다. 따뜻한 식사를 하다가도, 잠을 주무시다가도 “내가 이렇게 편하게 살아도 되는 걸까?”라며 미안해하셨다. 그러던 어느 초겨울 김장을 끝내고 어머니는 지난날을 떠올렸다.
“독립군들이 수시로 우리 집에 찾아왔단다. 그때마다 나는 큰 가마솥에 밥을 가득 지어 그들을 배불리 먹여 보냈지. 여비가 없는 사람들도 찾아왔어. 어떤 경우에도 손 목사님은 거절한 적이 없으셨단다. 얼마 안되는 생활비마저 다 남들에게 퍼주고 나면, 정작 우리 가족은 굶어야 했어.”
당시 어머니는 정미소에서 돌을 고르는 날품팔이를 하며 생활비를 보태셨다고 한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하나님은 우리가 퍼주면 퍼줄수록 더 많은 것들로 채워주셨다”며 감사했다.
어머니는 독립운동가인 남편을 존경했다. “나는 고문을 직접 겪지 않았지만 손 목사님을 보면서 그게 얼마나 끔찍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한밤에 목사님이 곤하게 주무시더니 갑자기 깨어 일어나시는 거야. 그러더니 급하게 온 방을 헤매시더구나. 깜짝 놀라 왜 그러시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일본 경찰이 시뻘겋게 달군 쇠꼬챙이를 가지고 내 얼굴과 몸을 지지니 너무 뜨거워서 깼소’라고 말씀하시더구나. 비록 꿈이지만 그건 현실이었어. 일본 경찰은 목사님을 감옥에 가두고 부젓가락으로 얼굴을 지지며 독립운동을 하는 동지들의 이름을 대라고 추궁했지. 하지만 네 시아버지는 한 사람도 대지 않았어. 얼굴에 생긴 그 흉터가 의로운 훈장이란다.”
남편인 원일씨도 일제에 고문을 당했다. 결혼 전 상하이에서 화물선 부선장으로 2년간 일한 뒤 잠깐 서울을 다니러 왔을 때, 일본 경찰에 끌려갔다. 독립운동가의 가정을 뿌리째 뽑을 심산이었던 것이다. 두 달 동안 구둣발에 차이고, 몽둥이와 가죽 채찍에 맞았다. 물고문을 당하느라 머리카락을 수도 없이 잡혀 감옥에서 나올 땐 이미 머리카락이 다 뽑힌 상태였다.
남편은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했다. 평생 협심증으로, 궂은 날씨에는 허리가 끊어져 나갈 정도로 통증을 느끼며 살았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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