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대부분 기업이 공탁 않고 조선인 노무자 임금 착취”
경술국치 100년 기획 잊혀진 만행… 일본 戰犯기업을 추적한다
제2부 낯선 기업, 숨은 가해자
② 일본제철, 철을 녹여 포탄으로
고쇼 다다시(77) 일본 도쿄 고마자와 대학 명예교수는 일본 경제사가 전공이었다. 1974년 어느 날, 같은 대학 동료 교수가 “옛 일본제철(신일본제철의 전신) 관련 자료 176권을 구해 도서관에 가져다놨으니 한번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지만 여유가 없었다. 그는 14∼16세기 무로마치 시대 직물산업 연구에 푹 빠져 있었다.
약 10년 후 고쇼 교수는 도서관에서 먼지가 내려앉은 자료를 꺼냈다. 176권을 하나하나 훑어보고 있는데 성격이 다른 자료 하나가 눈에 띄었다. 자료 이름은 ‘조선인 노무자 관계’. 일본제철 본사 총무부가 작성한 회사 내부 자료였다. 그 안에는 일본제철 야하타·가마이시 제철소 등에 동원된 조선인 3929명의 이름과 미지급금 공탁 내역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한 권의 자료는 그의 연구 방향을 180도 바꿔놓았다. 현재 고쇼 교수는 조선인 강제동원과 공탁금, 기업 전쟁 책임 분야의 권위자다. 허리가 굽은 노교수를 지난 1월 25일 일본 사이타마(埼玉市)현 신사야마(新狹山)시 그의 자택에서 만났다.
-‘조선인 노무자 관계’를 보고 나서 한국으로 편지를 보냈다면서요.
“그 안에 사망자 32명 명부가 있었어요. (일본 혼슈 북동부) 이와테(岩手)현 가마이시 제철소에서 숨진 조선인의 미지급 급여와 저금 등 명세서가 함께 있었죠. 동료 교수는 회사가 당연히 유족에게 사망 통지를 했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명부 사본을 유족에게 보내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회신이 있었습니까.
“편지를 보낸 시점이 1991년 11월 말입니다. 그해 연말과 다음해 초 10통의 편지가 왔습니다. 고맙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알았는데 여섯 분은 일본어를 몰라 편지를 보내지 못했답니다.”
고쇼 교수에게서 편지를 받은 유족들은 뜻밖의 소식에 깜짝 놀란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조차 알지 못하던 아버지, 할아버지의 최후를 반세기가 지나서야 알게 됐다. 유족 가운데 11명은 일본제철 후신인 신일본제철과 일본 정부를 상대로 도쿄지방재판소에 소송을 냈다. 1995년 9월의 일이다. 명세서에 있는 미지급금을 돌려달라는 게 소송 취지였다. 1심에서 신일본제철과는 합의를 봤지만 일본 정부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소송은 최고재판소에서 유족의 패소로 끝났다.
-1심에서 신일본제철은 사과의 뜻을 밝힌 겁니까.
“아닙니다. 신일본제철은 사죄의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97년 9월 22일자 마이니치 신문을 보면 신일본제철 대리인은 ‘유골 반환 의무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게 아니다. 유골이 돌아가지 못하는 사실을 위로한 것’이라고 기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왜 유족이 재판에서 졌나요.
“재판부는 당시 숨진 조선인의 주소가 ‘불명’ 상태여서 공탁 내용을 유족에게 알릴 수 없었다는 신일본제철과 일본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였습니다. 또 임금 채권 시효가 10년이라고 판단해 유족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패전 후 조선인 노무자들이 귀국하자 일본 기업은 그동안 쌓아둔 미지급금을 정부에 공탁한다. 공탁하면 피공탁자 앞으로 ‘공탁 통지서’를 보내는 게 원칙이다. 그러나 기업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거주지를 모르고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주소가 명확하지 않았다고요.
“일본제철은 조선인의 본적지 주소를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본적지는 거주지가 아니라는 이유로 공탁 통지서를 보내지 않은 거죠.”
-본적지는 거주지가 아니다?
“말이 안 되죠. 충분히 조선인에게 공탁 사실을 전달할 수 있었어요. 기록에 따르면 숨진 조선인 노무자의 유족 중에는 일본제철 연락을 받고 연금을 일시금으로 변경해 686엔을 공탁하게 한 경우도 있습니다. 본적지를 통한 연락이 가능했다는 뜻이에요.”
고쇼 교수는 서류 봉투에서 논문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내려놨다. ‘조선인 노무자 관계’를 연구한 결과물이다. 논문은 1991년 6월 발행된 고마자와대 경제학논집에 실렸다.
고쇼 교수는 ‘강제연행의 기업책임’ ‘조선인 전시 노동운동’ 등 강제동원 관련 책과 논문을 10여편 냈다. 김광열 광운대 국제협력학부 교수는 “기업의 전쟁 책임에 관해서는 90년대 중반이 돼서야 논의가 시작됐는데 고쇼 교수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분야의 선구자”라고 평가했다.
-‘조선인 노무자 관계’는 어떻게 대학 도서관에 들어간 겁니까.
“동료 교수가 도쿄대 앞 서점 ‘케이오 쇼보’에서 그 자료를 발견하고 대학 도서관에 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전에는 일본제철 총무부장이나 총무과장이 집에 보관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일본제철 말고도 많은 기업이 조선인에게 줘야 할 돈을 일본 정부에 공탁했습니다.
“미지급 공탁금은 일본 기업이 ‘돈을 지불하지 않고 사람을 썼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밥 안 주고 때리고 이런 것도 나쁜 일이지만 저는 조선인 노무자를 공짜로 부린 게 가장 큰 문제라고 봅니다. 또 다른 문제는 일본 기업이 정부에 맡긴 공탁금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일본 기업이 전부 다 공탁한 게 아니라고요.
“가마이시 제철소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각종 기록에는 그곳에 약 1200명의 조선인이 있었다고 나와 있어요. 그런데 임금이 공탁된 건 690여명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어떻게 된 거죠.
“기록이 없어요. 그 사람들이 가져간 돈이 아닌데, 어디로 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일본 기업이 가로챘을 수 있나요.
“제가 공탁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 조사해봤어요. 석탄광업 108개 회사가 조선인을 강제연행했는데 이 가운데 22%인 24곳만 공탁했어요. 대부분 기업은 공탁조차 하지 않은 겁니다. 금속광산 기업은 8%만, 토목건설 기업은 1.7%만 공탁했습니다. 기업들이 공탁하지 않고 조선인 임금을 착취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어요.”
-일본 기업이 이제라도 미지급금을 줄 수 있다고 보십니까.
“지금이라도 지급해야 할 돈은 다 줘야 합니다. 일부만 줘도 안 됩니다. 그건 피해자를 바보 취급하는 것이거든요.”
-노무 기록이 남지 않은 사람도 있을 텐데요.
“저는 정부와 기업, 시민이 함께 기금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명부에 없더라도 징용 당한 게 맞으면 일본 정부가 돈을 지급해야 합니다.”
신사야마(사이타마현)=특별기획팀 글·사진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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