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변재운] 한전과 전봇대

Է:2010-04-05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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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춘추-변재운] 한전과 전봇대

“감사원과 총리실까지 문제점을 지적하는데도 바뀌지 않는 현실이 놀라울 뿐”

얼마 전 지인을 통해 민원이 들어왔다. 어떤 사안에 대해 기사를 써달라는 것이었다. 언론사에는 우편이나 이메일, 혹은 이번처럼 지인을 통해 기사 민원이 적지 않게 들어온다. 대체로 억울한 사연인데, 막상 들여다보면 기사화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민원인들은 보통 정부 관련기관 등에 먼저 호소하고,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언론사를 찾아온다. 그러다보니 기사로 쓸 수 없는 억지성 민원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사안은 달랐다. 아무리 살펴봐도 민원인 주장이 타당했다. 감사원과 국무총리실 등 관계기관도 민원인 손을 들어줬다. 그런데도 해결이 안되는 게 오히려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에서 파워게임, 즉 힘의 논리는 여전히 유효하고 공기업이 사기업에 비해 비효율적인 이유를 알 듯도 했다.

내용은 전봇대에 관한 것이었다. 벤처기업 H사는 수년 전 기존 전봇대보다 강도가 훨씬 세고 부피는 20% 이상 적은 슬림전주 제조공법을 개발했다. 그러나 무용지물이란다. 채택이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발버둥치고 여기저기를 두드려도 성과가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현재 전국에 설치돼 있는 전봇대는 850만개로, 노후화에 따라 연간 50만∼60만개씩 교체된다. 이를 납품하는 전주 제조사들은 지난 1976년 개발된 아크릴절단공법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공법은 국토해양부의 ‘콘크리트 표준시방서’와 ‘토목공사 표준일반시방서’에 위배되는 부적합 공법이라고 한다. 미국과 일본도 취약성 때문에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전주 제조사들이 기존 공법을 쓰고 있는 것은 현재 KS 규격에는 적합한 것으로 돼 있기 때문이다. 즉 KS 규격이 국토해양부 기준과 맞지 않는 것이다. 기술표준원도 KS 규격을 국토부 기준에 맞춰 개정해야 할 필요성을 인정하고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다만 업무량이 많아 언제 개정될지는 모르겠다는 입장이다.

전주를 납품받아 설치하는 한국전력 역시 지금의 전봇대가 국토해양부 표준시방서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H사 기술을 이용하면 남품단가 인하, 운반비 및 토지사용료 절감 등을 통해 연간 150억원 이상 예산을 아낄 수 있고 사용연한도 길어진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시범사용을 위해 제조사에 슬림전주를 발주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제조사가 이런저런 이유로 응하지 않아 납품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럼 왜 제조사들은 H사의 새 공법을 이용하지 않는 것일까. 한전의 예산이 절감된다는 것은 그만큼 전주 제조사들의 매출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슬림전주를 제조하려면 새로 설비도 갖춰야 한다. 그리고 기술을 개발한 H사에 로열티를 내야 한다. 그런 것들이 새 공법을 애써 무시하는 이유일 듯하다.

아무리 그래도 대명천지 대한민국에서 이런 불합리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필리핀과 중국은 H사 기술 수입에 큰 관심을 보이면서도 한전이 사용하지 않는 점을 의아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결국 파워게임에서 제조사들이 한전을 능가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수요자보다 공급자가 우위에 있는 시장구조다. 당장 전봇대는 필요한데, 제조사들이 원심조합(16개 전주 제조사들의 이익단체)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납품을 하지 않으면 전력공급에 차질을 빚으니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형국이다.

H사의 질의에 국무총리실은 지식경제부를 거쳐 한전에 공문까지 보내 기존 공법이 부적합한 것은 물론 예산낭비임을 지적했다고 한다. 감사원도 2006년 한전에 대한 감사에서 슬림전주 도입을 강력히 권고했다. 그런데도 바뀌지 않는 것이 놀랍다. 그런 곳이 대한민국이라는 게 서글프다. 이러면서 기술입국을 부르짖고 중소기업 육성을 외쳐봐야 무슨 소용일지 모르겠다.

한전은 취재 과정에서 최근 유사기술 보유업체에 다시 발주작업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진정성을 갖고 추진하는 것인지 아니면 감사원 등의 지적을 의식한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변재운 논설위원 jwbyu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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